뉴욕 5번가를 걷다 마주치는 도시의 상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하 더 메트).
더 메트의 파사드에 동물들이 등장했다. 키가 3m에 달하는 사슴, 코요테, 다람쥐 그리고 매. 두 발로 선 이들은 구슬 장식의 목걸이를 둘렀거나, 푸른빛 망토를 두르고 있다.
신화 속 주인공이 존재한다면 이런 모습이었을까. 이 동물들을 세운 이는 제프리 깁슨이다. 미국 촉토 인디언 미시시피 밴드 소속이자 체로키 혈통을 지닌 예술가인 그가 뉴욕 허드슨강 유역과 센트럴 파크에 살고 있는 동물들을 청동 조각으로 재해석했다.
<더 제네시스 파사드 커미션: 제프리 깁슨, The Animal That Therefore I Am>이다.

지난 9월 15일 공개된 이번 전시의 제목은 프랑스 해체주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강연 시리즈와 동명의 책 제목에서 따왔다. ‘동물이기에, 내가 존재한다’는 뜻. 동물들이 자신만의 정체성, 공동체, 소통방식과 사회를 이루고 있으며, 그들의 방식이 인간과 동일한 위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제프리 깁슨(b.1972)은 2002년에 발간된 이 책을 인간, 동물 등 모든 생명체와 환경 간 유기적 연결성에 대한 성찰의 메시지로 해석했다.
그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뉴욕 북부 자택 근처 허드슨 강변에서 나무들을 채집했다. 10여 년간 매일 바라보던 풍경에서 초기 영감을 얻은 셈이다. 버려진 나무를 주워 여러 겹으로 엮어 형태를 만들고, 작업실에서 동물 가죽으로 감쌌다. 왁스, 나무, 박제된 가죽을 사용해 얼굴과 깃털, 발을 만들었다. 누비 망토부터 도토리 왕관, 열매 모양 목걸이 등 다양한 장식으로 동물을 꾸몄다. 이 모든 것을 디지털 스캔한 후 청동으로 주조했다. 섬유공예와 회화, 조각, 퍼포먼스 등을 넘나들던 그에게 청동 조각은 이번이 첫 도전이었다고. 제프리 깁슨은 더 메트의 수많은 컬렉션을 연구하며 자신의 문화를 포함한 다른 문화권에서 동물을 신성시하는 자료들을 찾았다. 이러한 세계관에서 토착민, 선주민과의 유대감을 발견했다는 게 작가의 말이다.


그는 이번 작품을 통해 뉴욕의 상징인 더 메트 옆 센트럴 파크와 자신의 집인 허드슨강 유역을 연결했다. 매일 같은 산과 물을 바라보며 동물과 자연을 관찰해온 그는 4종의 동물이 두 곳에서 모두 오랫동안 서식해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각 동물이 입고 있는 옷은 미국 선주민의 의복을 연상시킨다. 그에게 의복은 옷 그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을 입는 순간, 다른 존재가 되어 자신의 또 다른 정체성과 변화를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오랜 관찰은 작품마다 위트 있는 제목을 남겼다. ‘그들은 우리에게 예민하게 생각하고 본능을 믿는 법을 가르쳐준다’(사슴), ‘그들은 재치 있으며 우리를 인도하고자 스스로를 변형시킨다’(코요테), ‘그들은 미래를 계획하고 준비한다’(다람쥐), ‘그들은 밝은 곳과 어두운 곳 사이에서 메시지를 전달한다’(매).

제프리 깁슨은 누구인가
제프리 깁슨은 지난해 제60회 베네치아 비엔날레 미국관에서 단독 전시를 연 작가다. 1930년 미국관이 문을 연 뒤로 선주민 예술가가 초청받은 건 최초의 일. 제프리 깁슨은 1972년 콜로라도 스프링스에서 체로키족 혈통의 어머니와 촉토 인디언 미시시피 밴드 소속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미 국방부의 토목 기사였고, 가족은 노스캐롤라이나와 뉴저지, 서독과 런던, 한국 등을 옮겨 다니며 살았다.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다양한 문화를 접한 그에게 세상은 형형색색의 팔레트와 같았다. 2~3년에 한 번씩 터전을 바꿔야 했던 그의 삶에서 버팀목이 되어준 것은 ‘언제 어디서나 그릴 수 있는’ 그림이었다.
메릴랜드대에서 인류학, 고고학, 심리학 등을 공부하다가 1학년 때 자퇴하고 시카고 예술대에서 본격적으로 미술을 배웠다. 성소수자인 그는 퀴어 문화를 주도했던 시카고 클럽에서 여러 장르의 음악을 흡수했다. 이후 촉토 인디언 공동체의 후원을 받아 런던 왕립예술대학RCA에서 석사를 취득하며 선주민 예술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갔다. 그렇게 현대미술과 북미 선주민 예술을 결합하는 독자적 작업 세계를 구축했다. 하나하나 엮고 꿰맨 구슬과 실, 직관적 텍스트와 노랫말 등이 공존하는 그의 작품은 강렬한 색상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뒤늦게 미술을 배운 그에겐 시련의 시간도 길었다. 마흔 즈음, 백화점과 이케아 등에서 미술 관련 직업을 전전하다 뉴욕 한복판에서 생계를 이어가려던 시기가 있었다. 밤 10시부터 새벽 3시까지 그림을 그리고, 일주일에 75시간씩 일하던 때였다. 도시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작업에 집중할 장소를 찾아 뉴욕 북부로 떠나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 미술 시장 침체기에도 그의 작품은 수집가들의 관심을 끌었다. 2015년 크리스티스 뉴욕에서 낙찰된 23만3000달러의 ‘White Power’, 2023년 필립스 경매에서 15만2400달러에 팔린 밝은 무늬의 엘크 가죽을 덮은 ‘Shield, #3’ 등이 그렇다. 지난해 베네치아 비엔날레 이후 그는 더 메트에서의 전시는 물론 더 브로드 미술관 개인전, 하우저앤워스 파리 전시 등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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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심장부에 공공 현대미술 더 제네시스 파사드 커미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개관한 건 1870년. 현재의 모습으로 완공된 건 1900년대 초다. 웅장하고 고전적인 양식이 돋보이는 이 미술관은 300만 점이 넘는 소장품을 보유 중인데, 모두 순수 민간 기증으로 이뤄져 있다. 왕실 보관품이나 제국주의 시대 다른 나라에서 가져온 예술 작품을 토대로 국가 차원에서 건립한 여느 미술관과 달리, 더 메트는 민간이 중심이 되어 ‘뉴욕=예술의 중심지’로 만드는 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매년 700만여 명에 이르는 관람객이 다녀가는 세계적 랜드마크다.
더 메트의 외벽 파사드는 100년이 넘도록 빈 상태였다. 정문 파사드의 외벽을 오목하게 파서 만든 공간인 니시(Niche)는 원래 조각품을 전시하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건물을 처음 세울 때 자금이 부족해 비워두고 있었던 것. 2019년부터 더 메트는 이 공간에 현대미술 프로젝트인 ‘더 파사드 커미션’을 시작했다. 왕게치 무투, 캐럴 보브, 휴 로크, 나이리 바그라미안 등이 이 고전적이고 역사적인 건물에 현대미술 작품을 들여놓았다.
제네시스는 지난해 더 메트와 5년 후원 협약을 체결하는 아트 파트너십을 맺고, ‘더 제네시스 파사드 커미션’으로 이 프로젝트를 확장했다. 그 첫 전시로 지난해 9월 15일부터 올해 6월 10일까지 약 9개월간 <더 제네시스 파사드 커미션: 이불, Long Tail Halo>를 선보인 바 있다. 신체와 기계, 건축의 원형, 개인과 집단의 기억이 어우러진 이불 작가의 4개 조각품이 건축물과 역동적 대조를 이뤄 화제를 모았다. 9월 12일에 개막한 제프리 깁슨의 이번 전시는 2026년 6월 9일까지 계속된다.
제네시스는 심도 있는 예술적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세계적 예술기관 및 창작자를 후원하는 ‘제네시스 아트 이니셔티브Genesis Art Initiatives’를 전개하고 있다. 더 메트 외에도 영국 테이트 모던 미술관, 미국 LA 카운티 미술관과 파트너십을 맺고 있다. 런던 테이트 모던에서 지난 5월부터 10월까지 열린 화제의 전시 <더 제네시스 익스비션: 서도호: Walk the House>도 제네시스와의 파트너십으로 진행되었다. 올해 12월부터는 LA 카운티 미술관에서 ‘더 제네시스 토크’가 진행될 예정이다. 제프 쿤스, 마크 브래드포드, 피터 줌터 등이 연사로 나선다.
김보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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