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6월 데뷔한 혼성 아이돌 그룹 ‘올데이프로젝트’가 큰 인기를 끌고 있죠. 데뷔곡 ‘페이머스’는 국내 음악차트 1위, 음악방송 순위 1위에 오른 것뿐 아니라 빌보드 글로벌 200 안에도 들었어요. 12월에는 첫 미니앨범도 발표합니다. 멤버들 모두 실력이 뛰어나고 음악도 잘하는데요. 유독 한 사람이 주목받고 있어요. 바로 ‘재벌돌’로 불리는 애니, 문서윤입니다. 이명희 신세계그룹 총괄회장의 외손녀이자 정유경 신세계 회장의 장녀죠. 애니는 TV 예능에도 출연해 사람들이 듣기 힘든 대기업 총수 일가의 삶도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딸과는 반대로 애니의 엄마인 정유경 회장은 그림자처럼 움직이죠. 정 회장은 재계에서 유명한 ‘은둔의 경영자’입니다. 공식 석상에 서는 법이 거의 없고 한남동 자택에서 조용히 보고를 받으며 경영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흥미로운 건 이 조용한 엄마가 딸이 춤추는 무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거대한 ‘판’을 짜고 있다는 점입니다. 백화점을 넘어 도시 전체를 바꾸는 ‘부동산 디벨로퍼’로서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 신세계가 발표한 서울 강남 고속터미널 복합개발 청사진이 그 신호탄이죠. 정유경 회장은 오빠인 정용진 회장과 갈라서는 계열분리를 이미 공식화한 지 오래인데요. 계열분리 이후 어떤 그림을 그리는 것일까요.
정유경 회장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의 어머니 이명희 총괄회장을 알아야 합니다. 정유경 회장은 외모부터 성향, 경영 스타일까지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고 하죠. 이명희 회장은 삼성의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의 막내 딸이었고 백화점 사업을 삼성에서 떼어내서 가지고 나왔어요. 삼성에 비해 정말 작았던 사업 하나를 국내 10대 대기업 반열로 올려 놓은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한국 최고의 ‘부동산 디벨로퍼’ 중 한 명으로 평가되기도 하고요.
정유경 회장의 독립 경영은 바로 이 어머니의 ‘디벨로퍼 DNA’를 계승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백화점에 단순히 명품 브랜드만 채워 넣는 것을 넘어서 교통의 요지를 장악하고 그 위에 호텔, 오피스, 주거 시설을 얹어 거대한 ‘신세계 타운’을 만드는 전략입니다.
이 전략이 지금 더 절실한 이유는 (주)신세계 산하 자회사들의 성적표가 그리 좋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정유경의 신세계는 백화점 외에도 면세점(신세계디에프), 가구(신세계까사), 패션(신세계인터내셔날) 등의 사업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업들이 현재 전부 어렵습니다. 2025년 3분기 누적 실적을 보면 신세계디에프(면세점)는 영업손실 94억원을 기록하며 적자의 늪에 빠졌습니다. 인천공항 임대료 부담이 컸던 탓이죠. 패션과 화장품을 담당하는 신세계인터내셔날도 소비 침체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3분기 영업손실 20억원을 기록하며 적자로 전환했습니다. 가구사인 신세계까사 역시 부동산 경기침체로 3분기에 적자로 돌아섰습니다.
반면 본업인 백화점은 3분기까지 누적 매출 5조2000억원을 기록해 사상 최대 매출을 거둔 작년보다 더 매출을 잘 내고 있어요. 영업이익도 2600억원가량 거뒀습니다. 또 신세계 강남점을 비롯한 강남 고속터미널 일대 부동산을 모두 보유한 신세계센트럴 영업이익도 600억원에 육박했어요. 센트럴이 소유한 JW메리어트의 객실 점유율은 87%에 이를 만큼 영업이 잘되고 있습니다. 점유율 87%는 고가의 스위트 객실이나 여분 객실을 제외하고 사실상 ‘만실’이 됐다는 의미입니다.
믿었던 신사업들이 고전하는 상황에서 정유경 회장이 택할 수 있는 길은 가장 잘하는 ‘본업’인 백화점의 경쟁력을 극대화하고 돈이 되는 부동산 개발 모델을 확장하는 길로 보이죠.
정유경 회장은 강남고속버스터미널부터 새롭게 하고 싶어 해요. 얼마 전 청사진을 내놨는데 이렇게만 된다면 한국을 넘어 글로벌 랜드마크가 될 것 같습니다. 터미널은 지하로 옮겨 경부고속도로와 연결하고 터미널 위에는 최고 60층 이상의 주상복합 단지를 짓겠다는 게 핵심입니다. 또 지하철 3, 7, 9호선을 쉽게 갈아탈 수 있게 수직 네트워크를 연결하고 환승센터 옥상엔 드론 택시 정류장도 짓는다고 합니다.
원래 신세계는 고속터미널 부지 소유자가 아니라 세 들어 장사하는 세입자였습니다. 이명희 회장은 이곳이 상권의 핵심이 될 것이란 판단에 1조원을 들여 인수했어요. 이게 신의 한 수였던 겁니다.
센트럴시티 모델의 핵심은 ‘교통+쇼핑+주거+호텔’이 어우러져 시너지 효과를 낸다는 겁니다. 무엇보다 호남선과 경부선이 오가는 고속버스터미널과 지하철 3개 노선이 지나는 교통 허브가 하루 유동인구 100만 명을 끊임없이 공급합니다. 또 이 유동인구를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이 흡수해요. 이 백화점에는 루이비통, 에르메스, 샤넬 같은 명품 브랜드 매장이 100여 곳에 달해요. 명품 매출 비중은 40%에 달하는데 이건 20% 수준인 다른 백화점보다 훨씬 높은 것이죠. 단일 점포 최초로 연매출 3조원을 돌파한 비결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JW메리어트호텔과 같은 럭셔리 숙박 시설이 외국인 관광객과 비즈니스 고객을 유치해 백화점 매출을 견인해요. 마지막으로, 바로 옆 반포 래미안 원베일리, 아크로리버파크 같은 최고가 아파트 단지가 배후 수요를 받쳐줍니다. 사람을 모으고, 돈을 쓰게 하고, 머물게 하고, 살게 하는 생태계가 구축된 것입니다.

정 회장은 이 성공 방정식을 전국으로 복제하려 합니다. 광주신세계가 대표적이죠. 광주종합버스터미널 부지를 통째로 활용해 백화점 면적을 획기적으로 넓히고, 갤러리와 문화 시설을 결합한 랜드마크를 짓겠다는 구상입니다. 대구신세계 역시 KTX 동대구역 복합환승센터와 결합해 개점 1년 만에 대구 1등 백화점이 됐죠. 터미널이나 기차역을 끼고 복합개발을 하는 일본의 한큐, JR의 역세권 개발 모델을 한국에 완벽하게 이식하고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장밋빛 청사진만 있는 건 아니에요. 홀로서기 앞에는 만만치 않은 장애물들이 놓여 있습니다. 가장 시급한 건 온라인 사업 정리입니다.
현재 신세계그룹의 온라인 몰인 SSG닷컴은 이마트가 45.6%로 최대주주이고 (주)신세계가 24.4%를 갖고 있어요. 두 남매의 지분이 섞여 있는 거죠. 계열 분리를 위해선 (주)신세계가 보유한 이 SSG닷컴 지분 24.4%를 털어내야 해요. 오빠 정용진 회장에게 넘기든 제3자에게 매각하든 정리를 해야 비로소 ‘남남’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인데요. 지분을 정리하고 나면 정유경 회장에게는 온라인 채널이 사라집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독자적인 종합몰을 만들자니 승산이 없어요. 이미 쿠팡과 네이버가 장악한 시장이고 알리, 테무 같은 중국 플랫폼까지 치고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정유경 회장의 온라인 전략은 ‘버티컬 플랫폼’으로 갈 수밖에 없어요. 모든 물건을 다 파는 ‘오픈마켓’이 아니라 백화점이 가장 잘하는 럭셔리, 프리미엄 뷰티, 패션에만 집중하는 전문몰 형태입니다. 쿠팡에서 샤넬 가방을 사진 않잖아요. 명품과 프리미엄 브랜드는 ‘신뢰’와 ‘큐레이션’이 생명인데 이건 백화점이 가장 잘하는 영역입니다. 대규모 물류 투자 없이도 고마진을 낼 수 있는 효율적인 모델이기도 하죠. 현대백화점이나 롯데백화점이 온라인에서 존재감이 미미한 상황에서 정유경 회장이 이 ‘프리미엄 버티컬’ 시장을 어떻게 선점하느냐가 관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유경 회장의 해법은 ‘선택과 집중’, 그리고 ‘초격차 고급화’입니다. 대중을 상대로 한 영업은 이제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대신 구매력이 확실한 상위 1% VIP 고객을 위한 프라이빗 서비스, 예술 콘텐츠, 하이엔드 럭셔리 라인업을 강화해서 온라인으로는 절대 대체할 수 없는 ‘경험’을 파는 공간으로 백화점을 재정의해야 합니다. 실제 신세계 본점도 그렇게 바꿔 나가고 있죠.
정유경 회장은 과연 어머니 이명희를 뛰어넘는 ‘디벨로퍼’로서 신세계의 제2의 전성기를 열 수 있을까요. 정유경의 ‘진짜’ 신세계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안재광 한국경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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