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7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 하늘마당에서 열린 마당놀이 ‘홍길동이 온다’ 시연회. 막이 오르기 전, 무대와 객석은 이미 축제 열기로 달아올랐다. 사극에서 튀어나온 듯한 차림의 남사당패가 커다란 원형 무대를 돌며 흥겨운 우리 가락을 들려주자 중절모를 쓴 노년 관객부터 부모 손을 꼭 잡고 온 어린이 관객까지 저마다 장단을 타기 시작했다. 돼지머리가 놓인 상 앞에선 배우와 관객이 한데 어우러져 복을 비는 고사도 지냈다. 클래식이나 뮤지컬 공연에서 숨소리까지 조심해야 했던 관객에게 이날 무대는 마음껏 웃고 즐길 수 있는 해방감을 선사했다.

이번 공연은 국립극장이 25년 만에 선보이는 마당놀이 버전의 홍길동전. 서자 신분으로 태어나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이 평등한 세상을 이루기 위해 탐관오리를 벌하는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2025년 한국으로 날아온 ‘조선의 영웅’ 홍길동은 등장부터 시선을 압도했다. 이날 홍길동 역을 맡은 배우는 국립창극단의 간판스타 이소연. 와이어에 몸을 실은 그는 5m 높이 상공을 날아오르면서도 시원한 창(唱)을 흔들림 없이 뽑아냈다. 홍길동의 상징인 패랭이와 두건, 푸른색 쾌자가 여성 소리꾼에도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공중부양 장면으로 놀라기엔 이르다. 홍길동이 감쪽같이 사라지는 마술부터 배우들의 몸을 사리지 않는 아크로바틱, 롤러스케이트 퍼포먼스 등 고난도 동작이 쉴 새 없이 이어진다. 마당놀이와 서커스의 경계를 넘나들며 2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무대다.

대중문화 코드를 과감히 입혀 객석의 호응을 끌어낸 점도 탁월했다. ‘난세의 영웅’ 홍길동의 인기를 “BTS(방탄소년단) 뺨치는 홍길동 신드롬”이라고 표현하고 오늘날의 영웅 중 한 명인 축구선수 손흥민을 무대 위로 소환하는 등 홍길동전이 낡은 이야기로 머물지 않도록 다양한 장치를 더했다. 올해 전 세계를 사로잡은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사자보이즈’는 극 속에서 홍길동을 뒤쫓는 역할을 맡고 귀여운 호랑이 캐릭터 ‘더피’는 홍길동이 공중으로 날아오를 때 등을 내어주며 웃음을 자아냈다.
시대적 감수성을 고려해 여성 배우의 참여를 늘린 것도 세심했다. 홍길동 역을 맡은 이소연과 국악그룹 ‘우리소리 바라지’의 김율희 외에도 원작에는 없던 여성 활빈당원 ‘삼충’ 캐릭터가 추가됐다. 남성 중심의 영웅 서사인 홍길동전을 그대로 따르지 않음으로써 차별 없는 세상을 외치는 ‘홍길동 정신’을 오히려 더 뚜렷하게 새겨 넣은 것이다.

마당놀이의 본질인 풍자와 해학도 거침없이 쏟아졌다. 계엄과 주가조작, 뇌물수수, 매관매직 등 정권을 막론하고 위정자의 무능과 위선을 유쾌하게 꼬집어 관객의 공감을 얻었다. “뼈를 깎는 반성과 회개를 해야 할 자들이 참회의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구나. 나라의 장래가 정녕 한심스럽다.” 율도국에 있어야 할 홍길동이 2025년 한국으로 날아온 이유는 분명해 보였다.
공연은 11월 28일부터 내년 1월 31일까지.
<!-- notionvc: bfcb89f8-5eb8-4024-a9a3-badfa889ad6e --><!-- notionvc: 914256a8-84be-41e7-87ce-4dd55fef5fa6 --><!-- notionvc: 1c891958-0ed8-4f44-99d1-3b7955205339 -->허세민 기자
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