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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D 투자금, 썩고 썩어야 결실…실패 허용하는 환경 만들자"

입력 2025-11-30 17:15   수정 2025-12-01 01:18


동진쎄미켐은 한국 반도체 소부장(소재·부품·장비) 독립을 상징하는 기업이다. 2019년 일본이 수출 규제로 한국 반도체산업의 목줄을 쥐려 했을 당시 불과 3년 만에 극자외선(EUV) 소재를 국산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준혁 회장은 그 ‘분투의 3년’을 “기꺼이 위험을 무릅쓴 기회의 시간”으로 회고했다. 이 회장은 “선친이자 동진쎄미켐 창업자인 이부섭 선대회장이 생전에 늘 말씀한 ‘연구개발(R&D) 투자금이 썩고 썩어야 결실을 맺는다’는 이야기를 깊이 새기고 있다”며 “실패하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경험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동진쎄미켐 입사가 언제였나요.

“미국에서 유학하고 1994년에 돌아왔죠. 그때 동진쎄미켐은 연매출 300억원 정도의 작은 기업이었습니다. 선친께서 혼자 다 하셨어요. 입사하고 직원들 컴퓨터부터 사준 일이 기억납니다. 미국에서 보고 배운 전산화를 도입하고, 엑셀 교육을 했죠.”

▷그 직후 외환위기를 겪으셨군요.

“회사가 거의 망할 뻔했어요. 기술보다 자금이 문제였고요. 은행이 무너지면서 거래가 끊기고, 그래서 몇 년간 돈 구하러 다니느라 진땀 뺐습니다. 그러다 코스닥시장에 상장하면서 그야말로 숨통이 트였어요.”

▷당시 디스플레이 소재로 근근이 버티셨잖아요.

“맞아요. 1990년대 중반에는 반도체보다 LCD(액정표시장치)가 훨씬 빨리 커졌습니다. 반도체에 비해 기판이 컸으니까요. 당시 디스플레이용 포토레지스트(PR)가 주력 매출이었고, 그걸로 회사가 버텼어요.”

▷2019년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죠.

“일본 반도체 PR 수출 규제 사건과 국산화 사례 얘기죠? 사실 그 전부터 EUV용 반도체 PR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고객사들이 써주지를 않아서 매출이 없었죠. 그런데 일본의 선언으로 상황이 크게 바뀌었습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국산을 써보자’고 하면서 속도가 붙었습니다. 그 덕에 3년도 안 돼서 양산하는 대성공을 거뒀죠.”

▷그때 어떠셨습니까.

“힘들었죠. 시행착오가 많았습니다. R&D는 결국 리스크를 누가 감수하느냐 문제 같아요. 고객사가 일단 테스트해야 국산화도 진척되는데, 수출 규제 전에는 리스크를 지려는 움직임이 덜했죠. 일본 수출 규제 때는 기업은 물론 정부까지 모두가 리스크를 감수하고 열심히 개발한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는 어떤 학생이었나요.

“열심히 공부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그 시절엔 이과에서 우수한 학생은 서울대 공대를 가는 게 목표였어요. 물리학과나 전자공학과가 가장 인기가 많았고요. 나라가 고도 성장기여서 산업이 폭발적으로 커졌고, 인력 수요가 많았죠.”

▷화학공학과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선친이 화학공학 전공이셨습니다. 저는 사실 전산이나 전자 쪽을 생각했는데, 아버님이 ‘가능하면 화학 전공을 이어가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그렇게 됐습니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선 어땠나요.

“리액션 엔지니어링이라고 들어보셨어요? 화학반응이 일어나는 공정을 설계하는 기술인데요. 이걸 공부했죠. 그때 레이저로 이물질을 공중에 띄워 태우는 실험을 했습니다. 당시 그런 장비가 한국에는 없었죠. 미국에서는 아주 자유롭게 쓸 수 있었습니다. 슈퍼컴퓨터도 있었고요.”

▷연구 환경 차이가 컸나 보군요.

“격차가 컸습니다. 인력의 질보다는 인프라 차이였던 것 같아요. 당시 MIT 유전 연구 예산이 한국 전체 국가 R&D 예산과 비슷했을 겁니다.”

▷경영인으로서 공대 출신의 장점은 무엇인가요.

“기술을 알고 투자 결정을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너무 기술만 믿으면 독단에 빠질 수 있어요. 그래도 기술을 아는 게 모르는 것보다 낫습니다. 때때로 경영인으로서 우선순위를 냉정하게 결정해야 하지만, R&D만큼은 기다려 주기도 합니다.”

▷리더십이란 무엇일까요.

“임직원들이 얼마든지 실패해도 괜찮아요. 노력한 결과라면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실험을 해 본 사람은 실패의 과정을 아니까 다음 실패에도 다시 일어설 수 있거든요.”

▷선친께 받은 영향도 있습니까.

“네. 아버님은 포기를 모르셨습니다. 1980년대 때 회사가 부도가 났어요. 당시엔 부도가 나면 이름에 ‘빨간 줄’ 그이는 것과 마찬가지였는데 그걸 극복하고 다시 일어나셨거든요. 사람에 대한 신뢰도 잃지 않았습니다. 아버님의 “돈이 썩어야 나무가 난다”는 말씀도 항상 새겨요. R&D에 투입한 돈이 오랜 시간 썩고 썩어 거름이 돼야 비로소 나무가 자란다는 뜻이죠.”

▷선친께선 대단한 열정의 소유자셨군요.

“그럼요. 선친께서는 공무원 일을 하다가 집에 있는 광(창고)을 헐어 실험실을 만드셨습니다. 거기서 화학물질 합성 실험을 하셨어요. 제가 어릴 때 그 실험실에 불이 나 모친께서 저희 형제를 대피시키기도 하셨대요.”

▷회장님은 어떤 경영인이 되고 싶으십니까.

“아무래도 오래 살아남는 회사를 만들고 싶죠.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품목도 다양해져야 하고, 지금 위치에서 머무르지 않고 톱티어로 올라가야 합니다.”

▷이공계 인재 부족 문제는 어떻게 보십니까.

“정말 큰 위기입니다. 예전엔 최상위 인재들이 반도체나 공대로 진학했는데, 지금은 대부분 의대로 갑니다. 외환위기 때 엔지니어들이 일자리를 잃는 모습을 보면서 ‘불안정한 직업’이라는 인식이 생겼어요. 지금 학부모 세대가 그때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기업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직업 안정성을 높여야죠. 고용을 오래 유지하는 방법이 있을 텐데요. 60세 이후에도 연구 역량이 있으면 더 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문계 학생에게도 공학이 필요한가요.

“1~2학년 때는 이과 교육을 같이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수포자(수학 포기자)’가 너무 많아요. 수학을 모르니까 기술을 이해하지 못하고, 인공지능(AI)과 전자상거래 같은 걸 이해할 수 없습니다. 미적분 정도는 다 해야 합니다.”
"제조부터 소·부·장까…반도체 최전선서 본 中, 이미 여러 분야서 약진"
“중국보다 잘하는 걸 최대한 지키는 게 현실적인 대안입니다.”

이준혁 동진쎄미켐 회장의 가장 큰 관심사는 중국 반도체산업의 변화다. 글로벌 반도체 패권 전쟁의 최전선에 있는 그는 “중국의 약진을 생생하게 느낀다”며 “반도체산업에선 이미 제조는 물론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여러 분야에서 한국을 앞질렀다”고 평가했다.

이 회장은 “중국 정부의 ‘천인계획’이 빛을 보고 있다”고 말했다. 천인계획은 중국 정부가 2008년 시작한 국가 차원의 인재 유치 프로젝트다. 해외에 있는 중국인은 물론 외국 석학까지 현지로 불러들여 파격적인 연봉과 전용 연구실, 주택 등을 제공하는 것이 골자다. 그는 “1990년대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유학 시절 때부터 중국의 우수한 학생들이 미국 대학에 와서 공부하는 모습을 목격했고, 유명한 중국 출신 교수도 많았다”며 “수십 년의 결과가 누적돼 지금의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중국은 공산주의 국가지만 실물 경제가 돌아가는 모습은 시장경제에 가깝다고 본다”며 “중국은 나라 경제에 이바지하고 세금도 많이 내는 공학인과 기업인을 존중해 주는 문화가 강하다”고 짚었다. 이와 함께 중국 당국의 적극적인 지원이 반도체산업 성장에 한몫했다고 분석했다. “중국 정부는 칩 제조사에 보조금을 주면서 자국 소부장 활용을 독려한다”는 것이다.

한국 역시 공학 기반의 제조업을 일으키려면 국가의 강력한 드라이브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수한 과학자가 한국에 와서 연구하고 사업까지 할 수 있는 인프라를 마련해 줘야 한다”며 “과거 중화학공업 육성 단지를 만든 것처럼 창업 단지 등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이어 “전력·용수 인프라 문제에서 기업이 안정성을 가져갈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하는 작업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준혁 회장은…

△1967년 서울 출생
△1989년 서울대 화학공학과 졸업
△1994년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화학공학과 박사 졸업·동진쎄미켐 입사
△2008년 동진쎄미켐 대표
△2012년 산업발전 유공자 대통령 표창
△한국반도체산업협회 부회장
△2021년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 국제이사
△2022년 월드클래스기업협회 회장


강해령/황정환 기자 hr.k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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