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가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를 원화로 환전하지 않는 수출 기업을 압박하고 나섰다. 원·달러 환율이 1450원을 훌쩍 넘는 고환율이 지속되자 기업의 환전을 유도해 외환시장에 달러 공급을 늘리겠다는 취지다. 기업들은 “근본 대책이 될 수 없다”고 반발했다.
정부는 지난달 30일 외환 수급 안정화를 위한 관계장관회의를 열어 수출 기업의 환전 및 해외 투자 현황을 정기 점검하기로 했다고 1일 밝혔다. 이어 환전을 정책자금 등 기업 지원 정책 수단과 연계하는 방안을 검토하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달러 환전에 적극 나서거나 국내 설비 투자를 늘리는 기업에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등의 정책자금 한도를 늘리고 우대금리를 제공하는 방안 등이 거론된다.
정부는 이를 위해 수출 기업을 대상으로 벌어들인 외화 규모, 원화 환전 실적, 해외 증권 투자 내역 등의 자료를 정기적으로 제출하도록 요구할 방침이다. 환전하지 않는다고 제재할 권한은 없지만, 기업이 스스로 부담을 느껴 달러를 매도하도록 유도하겠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정부는 이 밖에 외화 수급 안정을 위해 전방위 압박을 이어가기로 했다. 금융감독원은 이달부터 다음달까지 증권사를 비롯한 금융회사의 해외 투자자 보호 실태를 점검한다. 서학개미에게 과도한 해외 투자를 종용하는 증권사 마케팅 활동 등을 살펴볼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연금 압박도 이어갔다. 정부는 올해 말 종료되는 한국은행과 국민연금 간 연 650억달러 규모 통화 스와프 계약을 연장하기 위해 세부 협의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국민연금의 해외 투자와 관련한 ‘뉴 프레임워크’를 마련하겠다는 계획도 재차 강조했다.
하지만 기업과 투자자의 달러 수요를 줄이기 위한 일련의 조치가 외환시장 안정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라는 지적이 나온다. 한 대기업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수출 기업이 환전을 하지 않아 원·달러 환율이 오른다는 인식에 동의하지 않는다”며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 약화로 고환율이 이어지는 것으로, 수출 기업에 환전을 압박하거나 인센티브를 제공한다고 환율이 내려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장도 냉담하게 반응했다. 이날 서울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70전 내린 1469원90전에 주간 거래(오후 3시30분 기준)를 마쳤다.
올해 수출 대금 절반만 환전, 구조적 원인은 해결 안하고…

한국은행이 이날 발표한 ‘3분기 중 주요 기관투자가의 외화증권 투자 동향’에서도 이 같은 흐름이 확인됐다. 환율이 큰 폭으로 오른 시기에 국내 기관투자가들의 3분기 해외 증권 투자 잔액은 4902억달러로 지난 2분기보다 247억달러 증가했다. 지난달 27일 기준 5대 시중은행의 기업 달러 예금 잔액은 537억달러로 10월 말보다 21% 급증했다.
정부는 이에 달러 수요를 부추기는 3대 주체로 지목된 국민연금과 서학개미, 수출 기업에 대한 대책을 내놨다.
먼저 주요 수출 기업의 외환 보유 및 환전 현황을 직접 받아보기로 했다. 지금까지는 한국은행의 전산망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보유 상황을 확인했지만, 앞으로는 정부가 직접 수출 기업들로부터 외환 관련 자료를 제출받아 적극적인 환전을 유도하겠다는 것이다. 외국환거래법 20조는 기재부 장관이 외환시장 안정 등 필요에 따라 외환 거래 기업의 자료를 보고받을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의 정책 대출과 보증 등에 환전 실적을 연계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3500억달러 규모 대미 투자펀드를 집행할 때 환전에 적극적인 기업을 우대하는 방안 등이 논의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감독원은 이달부터 다음달까지 증권사 등의 해외투자자 보호 실태를 점검한다. 서학개미의 해외투자를 직접 제한하기보다 과도한 투자를 부추기는 증권사의 마케팅 활동을 억제하겠다는 방침이다. 서학개미의 10월 해외 주식 순매수액은 68억달러로 무역흑자(60억달러)보다 많았다.
올해 말 종료되는 한국은행과 국민연금의 통화 스와프 계약(연간 650억달러 규모)도 연장한다. 국민연금이 외환시장에서 직접 달러를 사는 대신 한은의 외환보유액을 빌려서 투자하면 환율에 미치는 영향을 줄일 수 있다.
한 시중은행 외환 딜러는 “달러를 갖고만 있어도 10% 이상 수익을 낸 경험을 한 투자자들이 원화 자산으로 돌아올 이유가 없다”며 “올해 초 미국 기술주가 급락했을 때 환율이 일시적으로 안정된 것처럼 미국 증시가 폭락하지 않는 한 해외 투자는 줄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대와 실망을 반복하는 시장의 반응은 환율에도 반영됐다. 이날 아침 발표 직후 1465원대까지 떨어진 원·달러 환율은 다시 상승해 1469원90전으로 주간거래(오후 3시30분 기준)를 마쳤다. 지난달 26일 구윤철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이 기재부, 한은, 보건복지부, 국민연금 등 4자 협의체의 논의 개시를 발표했을 때도 환율은 1457원까지 하락했다가 간담회 직후 다시 올라 1465원60전에 마감했다.
김익환/정영효/강진규/이광식/남정민 기자 love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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