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성북구 동덕여대 정문 앞은 4일 오후 예정됐던 '래커 제거 행사'가 전격 연기되면서 긴장감이 감돌았다. 전날 학교가 2029년부터 남녀공학 전환을 공식 발표한 데다, 행사 하루 전 온라인에 칼부림 협박 글까지 올라오자 학교 측이 안전 문제를 이유로 일정을 잠정 중단한 것이다.
행사 시간이었던 오후 2시가 되자 정문 앞에는 '보여주기식 민주주의의 결과는 공학 강행'이라는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든 3학년 A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학생 몇몇은 1인 시위 중인 그에게 간식과 음료를 건네며 짧은 응원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A씨는 "교수·동문·교직원·학생이 1대 1대 1 비율로 권한을 행사했는데 학생은 수천 명이고 나머지는 몇백 명 수준"이라며 "구조적으로 불공정한 논의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공론화 과정이 완전히 공정했다고 보기 어렵고, 래커칠을 지우는 문제도 처음에는 '공학 전환 철회'를 조건으로 자발적으로 하겠다는 학생들이 있을 정도로 민감한 사안이었다"며 "이런 상황에서 학교가 반강제적으로 미화를 추진하는 건 합리적이지 않다"고 덧붙였다.

캠퍼스 내부에는 지난해 점거·래커칠 사태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여자 대학 지켜내자', '소멸할지언정 개방하지 않는다', '민주 동덕 각성하라'는 메시지가 적힌 래커 글씨가 건물 외벽 곳곳에 남아 있었고, 재학생·동아리·학생 연합이 붙인 대자보들도 교내 여러 공간을 둘렀다. 행사가 취소됐음에도 학교 앞에는 학생들의 불만과 긴장감이 동시에 흘렀다.
3학년 김모 씨(23)는 "학생 수가 가장 많은데 교수·직원·동문과 동일 비율로 권한을 나누는 건 말이 안 된다"며 "학생의 70% 이상이 공학 전환에 반대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작년에 52억 예산 이슈로 학생들이 욕도 많이 먹고 고생했는데, 지금 와서 래커 제거 행사 참여하면 커피 기프티콘을 준다는 식의 접근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3학년 고모 씨(22)는 "현재 학생 총투표가 진행 중인데 대다수가 공학 전환에 반대할 것으로 본다"며 "여대를 희망하고 입학한 학생들이 많아 일부는 '입시 사기'라고도 말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여성끼리 생활하며 느끼는 안전성과 편안함이 있는데 공학 전환 이후에는 이런 점이 사라질 수 있다"며 "이처럼 갈등이 극대화된 상황에서 래커 제거 같은 '상징적 화해'만 강조하는 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말했다.
동덕여대는 지난달 26일 공지를 통해 "본관 앞에서 락카 제거를 진행한다"며 학생·교수·직원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고 안내했다. 스크래퍼·장갑을 제공하고 참여자에게 커피 쿠폰을 지급하는 방식이었다.
총학생회 비대위는 "20일 학교 본부와 시설복구위원회가 회의를 진행했다"고 밝혔으며, 1~4일 실시한 설문에서도 참여 학생 725명 중 95.2%가 '락카 미화 작업 필요'에 응답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학내에서는 "형식적인 참여 유도 아니냐", "학생 의견을 충분히 듣지 않은 채 이벤트처럼 추진한다"는 반발도 나왔다. 특히 커피 쿠폰 지급 방식이 학생들을 실질적 논의 대신 '참여 이벤트'로 끌어들이려는 것이라는 지적이 제기되기도 했다.
동덕여대는 이날 학생·교수·직원이 함께하는 래커칠 제거 작업을 진행할 예정이었으나, 온라인에 올라온 칼부림 협박 글로 인해 행사를 급히 미루게 됐다.이 행사는 지난 시위 과정에서 곳곳에 남은 래커칠을 구성원들이 함께 지우며 갈등을 봉합하겠다는 취지였다. 학교는 당초 이날 오후 2시 행사를 진행할 계획이었지만, 전날 "학교에 갈 준비가 됐다"는 영어 문구와 함께 가방 속 칼 사진이 첨부된 협박 글이 올라오며 안전 우려가 커졌다.
동덕여대 관계자는 "온라인에 학교를 대상으로 한 위협성 글이 확인돼 경찰과 협의 중"이라며 "행사 참여자들의 안전 우려로 부득이하게 일정을 연기했다"고 밝혔다.
한편 전날 김명애 총장은 공론화위원회의 권고를 수용해 2029년부터 남녀공학 전환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김 총장은 "찬성 의견이 더 많았지만 재학생들의 반대와 우려도 무겁게 받아들인다"고 말하면서도 "창학정신을 발전적으로 계승해 시대 변화에 부합하는 새로운 100년을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정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학생 의견은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며 반발하고 있다. 동덕여대 총학생회는 이날부터 오는 5일까지 공학 전환에 대한 학생 총투표를 진행 중이다.
유지희 한경닷컴 기자 keeph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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