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당선을 확정 지은 지난해 11월 이후 주요 48개국 가운데 실질실효환율이 떨어진 나라는 12개국. 이 가운데 통화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붕괴한 아르헨티나(-14%)를 제외하면 우리나라의 낙폭이 가장 컸다. 한국의 실질실효환율은 작년 10월 말 93.68에서 올해 10월 말 89.09로 4.9% 하락했다. 명목환율에 물가 차이와 교역 구조를 반영해서 구하는 실질실효환율은 한 나라 통화의 대외 구매력과 가격 경쟁력을 나타낸다.실질실효환율이 폭락한 일본에서 대부분의 일본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가난해진 자신과 마주했다. 코로나19가 수습되면서 고대하던 해외여행에 나선 일본인들은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불과 2년여 만에 하와이의 핫도그값이 엔화 기준으로 2.5배 뛴 건 푸념 축에도 못 끼었다. 동남아시아 관광지조차 마음먹어야 갈 수 있을 정도로 엔화 가치가 떨어져 있었다.
해외여행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다. 실질실효환율이 하락했다는 건 자국 통화로 해외의 에너지와 식량을 사들이기 어려워졌다는 뜻이다. 치솟은 수입 물가가 시차를 두고 국내 소비자물가에 속속 반영되면서 필수 소비재 지출 비중이 높은 저소득층부터 삶의 질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실질실효환율도 2006년 12월 말 124.1의 정점으로부터 35% 급락했다. 실질 통화가치 하락으로 일본인이 받은 충격을 최근 우리도 경험하는 이유다.
한때 인기 휴양지였던 괌을 찾는 관광객이 끊어지면서 이 지역을 오가는 항공편은 ‘눕코노미’가 됐다. 이코노미석에서 누워서 갈 수 있을 정도로 텅 비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괌의 인기가 뚝 떨어진 건 지역 관광시설 낙후 때문이기도 하지만 환율 여파로 가격이 비싸진 점을 무시할 수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몇 년 만에 다시 찾은 미국 스테이크 레스토랑의 가격이 칼질하기 손이 떨릴 정도로 비싸졌다거나 비용 부담 때문에 유럽 여행을 동남아 여행으로 바꿨다는 사연도 드물지 않다.
올 3분기 1%대에서 움직이던 소비자물가지수는 11월 2.4%까지 올랐다. 국제 유가는 내렸는데 환율이 뛰면서 휘발유와 경유 가격이 크게 올랐고, 망고 키위 등 수입에 의존하는 과일 가격도 급등한 영향이다.
원화 가치 급락과 기록적인 실질실효환율 하락 역시 노동·연금·산업 구조조정 등 각 분야의 필수 구조개혁을 미룬 외상값을 치르라는 신호다. 이번에도 정치적 이해득실 때문에 구조개혁은 외면하고 돈 풀기로 표심만 얻으려 한다면 한국은 시장 신뢰 상실이라는 더 혹독한 현실을 마주해야 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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