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달자
핏줄 속에는
큰 손이 있는기라
보이지도 않으면서 화악 잡아당기는
쇠스랑 같은 손이 있다캉께
핏줄 속에는
발자국도 없이
저벅저벅 걸어와 기척 없이 몸 위에 드러눕는
뭉클한 가슴이 있는기라
그 뭉클한 가슴을 생으로 떼어 줘도 될 것 같은
아니 떼어 준 그루터기에서 비집고 나오는
새순 같은 그 질긴 생명력을
몇 배로 키워 다시 핏줄 안으로
쏴아 쏴아 내려 붓고 싶다캉께
핏줄 속에는
항시 몸비 마음비가 내려
뚝 뚝 떨어져 내려
뚝 뚝 떨어져 내릴 때마다 아파 아파 아파라
에미는 입에 들어가는 밥을 꺼내
뜨거운 화기로 뭉쳐 온몸 비비며
핏줄을 보호하려
모은 두 손이 다 닳았다 안 카드나
그래, 핏줄은 축축한기라 끈적끈적한기라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 징글징글한 기도인기라
그래서 핏줄은 푸르른 가지 속에 붉은 생명이 들어 있능기라
니 아나?
고향도 아버지같이 핏줄인기라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생명으로 태어난 고향
물이지만 쇠뭉치 같은 바위보다 더 무거운
그 질긴 줄을 저릿저릿한 핏줄이라 안 카드나
수세기를 흘러가는 줄
끊을 수 없는 역사라 안 카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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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레 한파가 닥친 4일 오후, 경남 거창 남하면 대야리 문화마을. 거창이 고향인 신달자(82) 시인의 이름을 딴 ‘신달자문학관’ 개관식에서 연극배우 박정자 씨가 이 시 ‘핏줄’을 낭독하자 곳곳에서 탄성이 터졌습니다.
“핏줄 속에는/ 큰 손이 있는기라/ 보이지도 않으면서 화악 잡아당기는/ 쇠스랑 같은 손이 있다캉께”로 시작하는 이 시에는 경상도 사투리 특유의 강한 억양이 행간에 담겨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투박하고, 어떻게 보면 속 깊고, 때에 따라서는 가슴 뭉클하고 아릿한 이곳 방언의 미묘한 말맛을 삶의 희로애락에 실어낸 작품이지요.
박정자 씨의 나직하면서도 웅숭깊은 음색이 문학관 마당과 건물 앞뒤를 어루만지며 차가운 공기를 덥히는 동안 전국에서 모인 축하객들의 몸과 마음도 덩달아 훈훈해졌습니다. 생존 여성 시인의 첫 문학관 개관이라는 상징성과 ‘시를 가장 잘 낭독하는 연극배우’의 멋진 화음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무대였습니다.
신달자 시인이 이 시를 쓴 것은 몇 년 전 겨울이었습니다. 여기저기 몸이 아파서 엄마와 아버지, 고향 등 뿌리를 찾았고, 내가 죽을 때 인사를 한다면 역시 고향과 엄마와 아버지와 이런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던 그때 “엄마는 늘 경상도 말을 썼는데 엄마 목소리로 저한테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쓴 시”라고 합니다.
시인은 “이곳 문학관에 들어오면 어머니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며 “거창은 바로 제 어머니인데, 그 어머니는 한이 많은 분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어머니가 평생 부르던 슬픈 곡조의 노래를 몇 소절 들려주기도 했습니다.
“어릴 때 어머니가 부르는 노랫가락에는 눈물이 흥건했는데, 가사를 마음대로 지어서 불렀어요. 당신이 가는 두 갈래 길을 내가 막을 수 없고, 내 두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당신이 막을 수 없다 뭐 이런 뜻이었습니다. 이 노래를 너무나 자주 불러서 우리가 막 달아날 정도였어요.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도 가고, 제 남편도 가고, 혼자 앉아서 술을 마시면서 제가 이 노래를 부르고 있더군요. 그 노래를 하나도 까먹지 않고 다 알고 있더라고요. 그만큼 어머니의 한과 슬픔이 ‘핏줄’로 이어져 내려온 건지…. 오늘은 그동안의 아픔을 다 내려놓고 기쁘게 우리 어머니가 다시 눈 감으면서 이 딸의 영광스러운 이 순간을 보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죽을 때까지 공부해서 꼭 박사 같은 거 돼라. 내가 살아 보니 돈이 많이 필요하더라. 돈도 많이 벌어라. 이 두 가지와 함께 네가 여자로서 꼭 행복하길 바란다”고 딸에게 당부했습니다.
어쩌면 어머니의 그 한과 슬픔이 딸을 성장시킨 자양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덕분에 남편과 시어머니를 간병하면서 세 딸을 억척스레 키우고, 나이 50에 박사 학위를 따 대학교수가 됐으며, 등단 60여 년 동안 시집도 17권이나 냈지요. 소설 <물 위를 걷는 여자>로 밀리언셀러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또 대한민국문학상과 만해대상, 시와시학상, 영랑시문학상, 공초문학상, 김준성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잇달아 받았고 한국시인협회장까지 지냈지요. 엊그제에는 대한민국예술원 부회장에 뽑혔습니다.

그동안 일군 문학적 성과뿐 아니라 인생 경영도 잘해서 이날 개관식에는 내로라하는 문화예술계 거장들이 대거 참석했고, 지역 주민들도 함께 어울려 축하해 주었습니다. 박정자 씨의 ‘핏줄’ 낭독에 이어 나태주 시인이 신달자 시인의 시 ‘아! 거창’을 낭독했고, 유성호 문학평론가는 ‘신달자의 시에 대하여’라는 문학론을 발표했습니다.
신 시인은 올해 받은 인촌상 수상 상금으로 거창의 미래인재 육성을 위한 장학금 2000만원을 전달했습니다.
문학관 건물은 새로 지은 게 아니라 ‘거창 예술인의 집’과 ‘청년농창업지원센터’ 등으로 활용하던 것을 리모델링해 지난달 완공했다고 합니다. 연면적 300㎡ 규모에 1층은 전시 공간, 강의실, 북카페를 조성하고, 2층은 수장고와 2개 전시실을 갖춘 공간으로 재탄생했습니다.
전시실을 둘러보니 그동안 시인이 받은 문학상 상패와 각종 증서, 문인들에게 받은 편지, 시화와 액자 등 다양한 자료가 망라돼 있습니다. 내년부터는 시인의 작품 전시를 넘어 이 지역 문인들의 창작과 낭송, 주민 대상 문학 강좌와 글쓰기 교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고 합니다.
“핏줄 속에는/ 발자국도 없이/ 저벅저벅 걸어와 기척 없이 몸 위에 드러눕는/ 뭉클한 가슴이 있는기라” 이렇게 우리 가슴을 뜨겁게 데우는 시인은 문학관 개관과 함께 “거창 그 자체”인 어머니와 고향과 아버지와 역사의 물줄기를 아우르며 다시금 우리에게 ‘핏줄’의 의미를 묻습니다.
“니 아나?/ 고향도 아버지같이 핏줄인기라/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생명으로 태어난 고향/ 물이지만 쇠뭉치 같은 바위보다 더 무거운/ 그 질긴 줄을 저릿저릿한 핏줄이라 안 카드나/ 수세기를 흘러가는 줄/ 끊을 수 없는 역사라 안 카드나”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유심작품상, 김만중문학상,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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