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로앤비즈의 'Law Street' 칼럼은 기업과 개인에게 실용적인 법률 지식을 제공합니다. 전문 변호사들이 조세, 상속, 노동, 공정거래, M&A, 금융 등 다양한 분야의 법률 이슈를 다루며, 주요 판결 분석도 제공합니다.

근대 과학을 지배하던 기본 원리는 뉴턴의 운동 법칙에 기반한 고전역학이었다. 고전역학은 초기 조건만 알면 미래를 계산할 수 있고 결과는 예측 가능하다는 결정론적 해석을 전제로 한다. 이 신념은 19세기 말까지 흔들림이 없었다. 사과가 떨어지는 이유에서부터 행성이 움직이는 방식까지, 일상에서 목격하는 대부분의 현상은 고전역학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었다.
양자역학 조롱하려다…상징이 된 실험
그러나 20세기 초, 과학자들이 원자와 전자로 이뤄진 미시 세계로 관심을 돌리자 이 견고한 신념이 근본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 실험실에서 관찰된 미시적 입자의 세계는 고전역학이 예측하는 방식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기존 이론으로 설명할 수도 없었다. 파동이면서 동시에 입자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희한한 경우까지 나타났다. 고전역학이 지배하는 세계 아래에 인간의 직관을 거부하는 또 다른 세계가 숨어 있었던 셈이다.이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양자역학이다, 그리고 그 중심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있다. 이 원리에 따르면 양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동시에 측정할 수 없다. 측정이라는 행위 자체가 위치와 운동량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측정하기 전까지는 어느 것도 확정된 값이 아니기에 전자는 특정한 곳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다. 존재할 확률만이 있을 뿐이다. 당시 물리학계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너무도 황당하고 상식을 벗어난 이론이었다. 많은 학자는 해괴한 주장이라며 조롱하기까지 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사진)다. 그는 불확정성 원리의 비상식성을 비판하고자 하나의 사고 실험을 고안한다. 오늘날까지도 교과서에 등장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다. 독극물이 50%의 확률로 방출되도록 설계된 상자에 고양이를 넣은 뒤 버튼을 누르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상식에 따르면 버튼을 누르는 순간 고양이는 살았거나 죽었거나 둘 중 하나의 상태가 될 것이고, 상자를 연 이후에는 이미 발생한 결과를 확인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양자역학 신봉자들은 상자를 열어 눈으로 관측하기 전까지 고양이의 생사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중첩 상태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미 발생한 결과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여는 순간 그로 인해 비로소 고양이의 운명이 확정된다는 얘기다. 슈뢰딩거에게 이는 말도 안 되는 억지였고, 그는 이 실험을 통해 양자역학이 얼마나 황당한 것인지 보여주고 싶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양자역학을 믿는 학자들은 이 실험을 오히려 반가워했다. 그들은 "바로 이게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라며 무릎을 쳤다. 양자역학을 비판하고 조롱하기 위해 만든 비유가, 역설적으로 오늘날 양자역학을 설명하는 가장 직관적이고 대표적인 사고 실험이 된 것이다. 과학사에서 보기 드문 아이러니이자 재밌는 에피소드다.
매 사건 선고 직전…법정 속 양자역학
법관으로 재직할 때는 몰랐으나 변호사가 된 이후 자연스럽게 이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떠오르는 순간들이 있다. 하나의 사건이 종결될 때 법관은 모든 심리를 끝내고, 판결문 작성까지 마친 뒤, 선고기일에 그저 정해진 결론을 고지할 뿐이다. 당사자들만 모를 뿐 결과는 이미 확정된 상태다. 그러나 판결 내용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기다리는 변호사 입장이 되고 보니, 이 '확정된 결론'이라는 것이 얼마나 멀고도 아득한지 새삼 깨닫는다. 민사든 형사든, 중요한 판결을 기다리는 당사자의 마음은 피가 마를 지경이고, 중요 사건이라면 변호사도 별로 다르지 않다.
이길 사건을 이기고 질 사건을 진 것에는 그나마 수긍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논리적으로 따져 봐도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판결,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결과를 마주할 때면 순간 정신이 아득해진다. 특히 선고를 직접 들으러 갔던 사건에서 연달아 안 좋은 결과를 경험하다 보면, 전혀 이성적이지 않은 생각마저 들게 된다. "혹시 내가 선고기일에 들어가서 결과가 나빠진 건 아닐까? 다음부터는 가지 말아야 하나?" 스포츠 팬들이 "내가 경기장에 가면 우리 팀이 진다"며 일부러 경기장을 찾지 않는다는 농담을 하는 것과 비슷한 심리일 것이다. 심지어 선고기일 직전에 뭔가 나쁜 일을 하면 왠지 벌을 받아 결과가 안 좋아질까 봐 가급적 근신하려는 우스운 마음마저 드는 경우도 있다.
선고일 이전에 이미 재판부는 결론을 내렸고, 당사자는 그 결과를 사후적으로 확인하는 것에 불과하다. 내가 법정에 있든 없든, 그리고 선고일에 뭘 하든 그 과정에서 결과가 달라질 리 없단 얘기다. 그런데도 선고 직전까지 변호사의 마음속에선 슈뢰딩거의 상자 속 고양이처럼 '이긴 것도 진 것도 아닌', 불확정한 상태가 이어진다. 상자를 열어보는 순간에 고양이의 생사가 결정된다는 논리처럼, 선고가 내려지는 그 순간 판결이 결정되는 것과 같은 착각까지 하게 된다. 누군가는 양자역학을 공부하느라 자녀의 결혼식을 잊어버렸다지만, 변호사가 돼 양자역학까지 생각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판결의 결과를 확인하기 전까진 마치 아무 결과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 이것이 판결을 앞둔 당사자들의 마음이다.
그래서일까. 선고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은 늘 조심스럽다. 이메일 하나를 열어보는 일조차 마치 도박꾼이 패를 쪼듯 긴장된다. 오늘도 반드시 이겨야 하는 중요한 민사 사건의 선고일. 법인 직원이 법원에서 보내온 짧은 선고 통지 메일을 차마 바로 열지 못하고 잠시 바라본다. 이 짧은 메일 속 한 줄 텍스트 안에 누군가의 인생, 회사의 운명, 나의 업무 실적과 자존심이 모두 함께 들어 있다. 그리고 결국 마우스를 클릭한다. 그 순간 상자 안의 고양이처럼, 이 판결에 운명을 건 나의 의뢰인은 과연 살아 있을까.
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