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할아버지는 19세기 말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인물이다. 사업가 시절 트럼프는 독일계 혈통이 자랑스럽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그러나 정치인 트럼프는 이념이 맞지 않는다며 독일을 비롯한 유럽에 비판적인 태도로 돌아섰다. 그는 2016년 대선 캠페인에서 유럽연합(EU)을 비난하며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를 지지했다. 당시 독일의 이민 정책을 “실패”라고도 꼬집었다. 트럼프 1기 행정부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방위비 분담, 무역과 관세 문제 등에서 유럽과 잦은 갈등을 빚었다. 트럼프 2기는 더 신랄하다. 유럽의 정치 체제와 정체성까지 강하게 비판하며 변화를 촉구하고 있다. 트럼프는 지난 9월 유엔 총회 연설에서 “유럽은 지금 지옥으로 치닫고 있다”며 이민 제한과 신재생에너지 폐기를 촉구했다.
이런 가운데 미국이 지난 5일 발표한 새 국가안보전략(NSS)이 유럽을 충격에 빠뜨렸다. 이 전략은 “고유의 가치를 잃은 유럽은 국제사회에서 존재감이 미미해지고 있다”며 “문명의 소멸 위기”라고 진단했다. 중국과 정면충돌을 피하고, 러시아와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는 미국이 우방인 유럽을 이렇게 몰아붙이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전략적인 행동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트럼프는 사회민주주의 전통이 강한 유럽이 미국보다 강력한 기업·환경 규제를 하고, 인종·성별·종교 다양성을 인정하는 점을 못마땅하게 여겨왔다. 이 때문에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로 분열 양상을 보이는 유럽이 진보적 가치를 내려놓고 미국식 자유주의와 전통적 보수주의를 받아들이도록 유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럽 국가들은 새 NSS에 대해 “용납할 수 없는 내정 간섭”이라고 반발했다. 뉴욕타임스는 “유럽이 전략적 기로에 서게 됐다”고, 프랑스 르몽드는 “유럽에는 총구를 겨누고 적국에는 관용을 베푸는, 사실상 대서양 동맹의 파경”이라고 평가했다. 이 같은 상황은 남의 일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비록 미국이 한국을 ‘모범 동맹’으로 치켜세웠지만 트럼프의 대중, 대북 정책의 향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서욱진 논설위원 venture@hankyung.com
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