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송은 과거의 행위에 대한 다툼이지만 그 결과는 미래의 행동을 바꾼다. 2015년 대법원 판결(대법원 2015. 2. 26. 선고 2010다106436 판결 등)을 비롯하여 수많은 불법파견 판결이 기업들에게 각인시킨 것은 원청(도급인)과 하청(수급인)은 분리되고 달라야 한다는 점이다. 원청이 하청 근로자를 지휘·감독해서는 안 되고 원·하청 근로자가 함께 근무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이들은 다른 옷을 입고, 다른 시설을 사용해야 한다. 하청 근로자들이 원청으로부터 교육을 제공받아서는 안 되고, 격려금이나 성과금을 받아서도 안 된다. 사실 원청 사업주는 하청 근로자의 근무나 복지에 대해서는 그것이 무엇이든 가능한 신경을 쓰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최근 기업들은 협력업체 근로자들의 근로조건에 적극적으로 관여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 가령, 개정 노동조합법(이른바 노란봉투법)에 따른 원청 교섭은 하청 근로자의 근로조건에 대한 원청의 개입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노란봉투법에 따르면 원청은 하청노조와의 교섭테이블에 나와서 하청근로자의 안전, 급여, 근무환경, 복지 등 원청이 실질적 지배력을 가지는 의제에 관해서 교섭해야 하고, 교섭이 여의치 않으면 쟁의행위를 감수해야 한다. 또다른 예로 유럽연합 기업 지속가능성 실사 지침(EU CSDDD)은 원청이 협력업체의 노동환경 등을 파악하고 이에 대처할 것을 요구하는데, 이 지침은 이미 우리 기업에도 강한 영향을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유사한 내용을 규정하려는 입법안도 계속 논의되고 있다.
결국 불법파견 판결에서 비롯된 원·하청 간 분리 원칙은 원청이 하청 근로자들의 처우 개선에 나설 것을 요구하는 최근의 사회적, 정책적 경향과는 모순되는 방향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많다. 불법파견 법리에 따르면 원청이 하청에 관여할 수록 파견관계가 인정되어 직접고용의무를 부담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원청은 직접 고용의 대상이 무한정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하청에 대한 관여를 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약, 어떠한 기업이 그 사회적 책임을 이행하는 차원에서 혹은 노란봉투법에 따라 하청 노조의 요구를 받아들임으로써, 하청 근로자들에게 일정한 교육이나 복지프로그램을 제공한다면 이는 당장 불법파견의 증거로 사용될 수도 있다.
특히 우리 법원은 원청의 선의에서 비롯된 ‘상생협력’ 행위들을 불법파견의 증거에서 제외하는 데 인색한 편이다. 가령, 서울고등법원 2018. 5. 29. 선고 2017나2005844, 2017나2005851 판결(상고기각 확정)은 원청이 하청 근로자들을 상대로 실시한 교육 내용을 문제삼았다. 이 사건에서 원청은 상생협력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하청업체 근로자들을 상대로 하는 ‘OO스쿨’이라는 별도의 교육과정을 만들었고, 이를 통해 적극적으로 경영·기술 교육을 제공하였는데, 정작 그 교육내용이 불법파견의 중요한 근거로 판단된 것이다. 위 판결은 원청이 제공한 교육자료 중 특히 ‘과잉생산의 낭비’, ‘대기의 낭비’ 등이라는 표현을 문제삼았는바, 위와 같은 표현은 하청 근로자들이 원청에 세부적인 부분까지 종속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근거 중 하나라고 판단한 것이다. 판결문에 구체적인 설명이 제시되지는 않았으나, 재판부는 위와 같은 교육자료를 일종의 ‘지시’로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가령, 원청이 하청 근로자들에게 과잉생산이나 대기시간에서 발생하는 낭비를 없애도록 철저하게 통제하였고 그러한 지시를 교육자료를 통해 전달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위 교육자료는 사실 ‘도요타 생산방식’의 기초이론을 설명하는 내용이었다. 전세계 제조업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진 ‘도요타 생산방식’은 이른바 ‘7대 낭비’를 제거함으로써 효율성을 제고하는 것을 핵심 내용으로 하고, ‘과잉생산의 낭비’, ‘대기의 낭비’는 그 7대 낭비 중 하나이다. 결국 이 사건에서 문제된 부분은 원청이 협력업체의 역량 강화를 위하여 기초적인 생산관리 이론을 교육한 것이었으나 불법파견의 증거로 판단된 것이다. 이는 애플 등 세계적인 기업들이 협력업체 역량강화를 위하여 ‘생산 라인 지도자 프로그램’ 등 다양한 교육을 제공하고 있다고 그 홈페이지에서 자랑스럽게 홍보하고 있는 것과는 크게 대비되는 부분이다.
근로자의 안전을 위한 조치도 불법파견의 증거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가령, 서울고등법원 2023. 1. 27. 선고 2022나2008021 판결(심리불속행 기각 확정)은 시멘트 공장에서 중장비를 운전한 수급인 소속 근로자들의 불법파견 여부가 문제된 사안에서, 수급인 소속 근로자들이 안전수칙을 위반하는 경우 도급인이 작업금지, 출입정지 등의 처분을 할 수 있다는 계약조항을 문제삼았다. 즉, 위 판결은 협력업체 근로자의 안전수칙 위반에 대한 작업금지, 출입정지 등 처분이 실질적으로 징계와 유사한 불이익 처분이라고 판단하였고, 이러한 사정 등을 근거로 제시하며 수급업체가 그 소속 근로자들에 대한 인사권을 독자적으로 행사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보아 불법파견의 성립을 인정하였다.
이와 같이 불법파견 법리와 원청의 법적·사회적 책임에 대한 요구가 충돌하는 상황에 대한 하나의 대안은, 사회적 책임의 이행이나 법령 준수를 위한 원청의 조치는 불법파견 소송의 증거에서 제외하거나 적어도 의미를 제한하는 것이다. 미국 연방증거규칙(Federal Rules of Evidence)이 공공정책상의 이유로 일정한 증거를 배제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도 참고할 수 있다. 가령, 위 규칙 제407조는 어떠한 사고가 발생한 후 그러한 사고의 발생가능성이나 피해를 줄이기 위한 조치를 취한 때에는 그 조치가 과실이나 유책성, 제품의 결함 등을 입증하는 증거로 사용되지 못하도록 정하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소송상의 다툼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조치를 막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정책적 규정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입법이나 판례를 통해 채택할 수 있는 법리라고 생각된다.
나아가, 정책적 우선순위에 대한 선택이 필요하다. 하청 근로자의 직접고용을 최대한 확대하기 위한 정책과, 하청 근로자의 처우를 최대한 개선하기 위한 정책은 원래 충돌하기 쉽다. 적어도 무엇을 우선할지 고려가 필요하고, 정부나 사회가 이를 선택하지 않으면, 그 부담과 혼란은 기업과 근로자의 몫이 된다.
구자형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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