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대제 스카이레이크인베스트먼트 회장은 최근 꽤 좋은 천체망원경을 구입했다. 10대 시절 관심이 컸던 우주에 대해 본격적으로 파헤치기 위해서다. 새로운 공부를 시작한 진 회장은 요즘 ‘탐구하는 엔지니어’라는 본인의 정체성을 다시 느낀다고 한다.
1호 미국 국비유학생, 삼성전자 최연소 임원(1987년 당시 35세), 수십억원 가치의 스톡옵션을 포기하고 맡은 정보통신부 장관을 거쳐 유명 사모펀드(PEF) 회장까지. 진 회장의 화려한 경력 뒤엔 남모를 고난의 시기도 있었다. 위기 극복의 원동력은 공대 출신 엔지니어 특유의 ‘호기심’과 ‘도전 정신’. 진 회장은 “나의 삶은 궁금하면서도 좋아했던 것(물리, 수학, 공학)을 잘하기 위한 도전의 연속이었다”며 “나이 먹은 지금도 똑같다”고 말했다. 70세 넘어서도 물리·수학 지식을 활용해 골프공의 궤적을 분석하는 앱을 개발하고, 인수 회사(솔루스첨단소재) 제품 수율을 올리기 위해 생산라인을 직접 도는 진 회장의 열정이 그제야 이해가 됐다.

▷왜 의대가 아니라 공대에 갔습니까.
“당시(1970년대 초반)엔 공부 좀 한다는 이과생은 당연히 서울대 물리학과 아니면 전자공학과를 갔습니다. 의대는 이공계 학과 순위로 따지면 20번째였죠.”
▷전자공학을 택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서울대 시험을 본 뒤 동문 전자공학과 선배를 만났습니다. ‘물리, 수학도 잘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한 번 해보자’ 싶었죠. 청계천에 가서 고급미적분 원서를 사서 입학하기 전까지 파고들었습니다.”
▷반도체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주로 물리, 수학 이런 걸 파다 보니까 결국 반도체로 이어지더라고요. 그런데 당시 한국에 반도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거의 없었어요. 제가 석사 학위 반도체 논문을 한국에서 처음 쓴 사람일 정도입니다.”
▷어려움이 컸을 것 같습니다.
“소재는 재료공학과 가서 빌리고, 웨이퍼는 당시 한국반도체(삼성전자 반도체사업의 전신)에 가서 얻어오고 그랬죠. 열악했지만 즐거웠습니다.”
▷지도교수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았겠습니다.
“마침 KAIST에 김충기 교수님(한국 반도체학계 대부로 불리는 석학)이 오셨습니다. 당시 서울대와 KAIST는 라이벌 의식이 강했죠. 서울대에 적을 뒀지만, KAIST 서울 캠퍼스로 찾아갔어요. 김 교수님이 반도체를 한다고 하니까 특별 공부방도 만들어주셨습니다.”
▷석사 후 미국 유학길에 오르셨습니다.
“1977년에 MIT(매사추세츠공대)로 갔는데, 시뮬레이션을 중심으로 하는 학교였죠. 반도체학회지에 논문도 싣고 했지만 ‘공부를 더 해야겠다’ 싶어서 스탠퍼드대에 장학금을 받고 갔습니다.”
▷스탠퍼드는 달랐습니까.
“일단 천재가 많았고요. 박사 과정에서 요구하는 게 반도체가 다가 아니었습니다. 컴퓨터 등 다른 쪽 수업을 들었죠. 당시 한국에서 가르치지 않은 분야였습니다.”
▷고전하셨을 것 같습니다.
“컴퓨팅 관련해서 숙제를 열심히 풀어서 제출했는데 60점 만점에 10점을 받았죠. 영어가 문제인가 싶어 교수를 찾아가서 이유를 물어보니 ‘영어가 문제가 아니라 답이 틀렸다’고 하더라고요.”
▷앞이 캄캄하셨겠습니다.
“교수님께 사정해서 기본 교재를 소개받았습니다. 강의를 다 알아듣지 못했지만, 발표도 하고 더 적극적으로 했습니다. 2년 있으니까 ‘올A’를 받게 되더라고요.”
▷불모지에서 길을 찾는 것의 연속이었네요.
“맨땅에 헤딩했죠. 하지만 저는 정말 좋아서 공부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저를 이길 수 없었습니다. 스탠퍼드에서도 위상수학 같은 과목은 저만 답을 썼습니다.”
▷IBM에서 현장을 배우셨죠.
“1983년 박사 학위를 받고 IBM에 갔습니다. 4메가 D램을 하는 팀에서도 근무했고요. 1년 정도 있으니까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계속 D램 분야에 계셨습니까.
“회로 설계를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관련 팀에 있는 동문에게 ‘너희 팀에 나도 끼워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회로설계에 1년 있으면서 CMOS(상보형 금속산화물 반도체)를 배우고, 설계하다가 1985년 10월 삼성으로 갔습니다.”
▷계기가 있었습니까.
“IBM은 좋은 회사였어요. 1983년에 연봉 4만7000달러를 받았고 또 부서 옮길 때마다 월급을 15%씩 올려줬어요. 하지만 원래 저는 한국에서 일하려고 했습니다.”
▷IBM에서 가만히 안 있었을 텐데요.
“당시 IBM에서 50건 정도 특허를 썼고, 평가가 괜찮았어요. 그런데 IBM은 일본업체가 아닌 제3의 D램 파트너사가 필요했거든요. 제가 삼성에 가서 ‘일본 잡고 IBM에도 도움이 되겠다’고 하니까 흔쾌히 보내주더군요.”
▷‘삼성이 반도체 하면 망한다’고 할 때 아닙니까.
“삼성이 1985년 원가 1달러35센트짜리 64K D램을 35센트에 팔며 적자를 볼 때였습니다. 주변에서 다 말렸죠.”
▷삼성에 가서 첫 업무가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삼성에서 국책과제로 하고 있던 4메가 D램을 맡았습니다. ‘트렌치’(아래로 뚫는) 방식과 ‘스택’(위로 쌓는) 방식 중 선택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제가 ‘스택으로 해보자’고 제안했습니다.”
▷받아들이던가요.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이었죠. 경영진에게 ‘트렌치는 구멍 속에 뭐가 생기는지 모르는데, 스택으로 올리면 월등히 쉽습니다’라고 보고했습니다.”
▷그 이후엔 일사천리였나요.
“웨이퍼 100장을 투입했는데, 트렌치 방식은 다 불량이었죠. 스택은 15~16장 살아나왔습니다. 당시 대통령이 ‘4메가 개발 성공 축하연 한다’고 할 정도였어요.”
▷힘든 일은 없었습니까.
“16메가 D램에 불량도 있었어요. 제가 사업부장(전무)으로서 불량을 해결하는 프로젝트를 이끌었습니다. 불량을 해결하기 위한 미분방정식을 만들어 문제점을 찾았죠. 천운인 게 당시 D램이 공급 부족 상황이어서 ‘크게 문제없으니 쓰겠다’는 고객도 많았습니다(웃음).”
▷결국 기본이네요.
“수학이나 물리를 알아야 반도체 안에 다른 문제를 해결합니다. 기술 문제에 직면했을 때 기본에서 출발해 분석하고 해결할 때가 많아요.”
▷대학도 그런 부분을 강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난주에도 공대생 다섯 명이 찾아와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라고 묻더군요. ‘기본적으로 자네가 지금 대학교 3학년이면 3학년 때 해야 할 일을 가장 충실히 하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전공이면 전공, 기본적인 수학이나 물리를 잘해야죠.”
▷인공지능(AI) 시대에도 기본이 중요하겠죠.
“네 맞습니다. 하나 더 하자면, 새로운 환경도 중요합니다. 국내에서 잘하더라도 MIT, 스탠퍼드 가서 경쟁을 해봐야 합니다. 대가에게서 얘기를 들으면 시야가 넓어집니다.”
▷글로벌에서 도전하란 말씀이시네요.
“도전하는 삶을 사는 게 중요합니다. 젠슨 황, 빌 게이츠 등은 모두 이과 출신인데 도전해서 대단한 부자가 됐고 명성을 날리죠. 도전하지 않으면 그만큼의 삶만 살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의대 광풍이 불고 있습니다.
“지금 의사 중 젠슨 황, 빌 게이츠만큼 유명한 사람 있습니까. 의사는 평생 많이 벌면 30억~50억원이겠죠. 이공계 소양을 갖추고 신약 개발하는 스타트업을 창업하면 1조원도 벌 수 있습니다.”
▷높은 목표에 도전하란 말씀이시네요.
“의사가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뛰어난 인재라면 목표를 더 높게 가지라고 하고 싶네요.”
▷퍼스트무버의 시대, 한국의 인재상은 무엇입니까.
“저는 회사를 경영하기도 하고 투자도 하며 3000개 이상의 회사를 분석했습니다. 결국 사람에 달렸어요. 사람이 남다른 생각을 해서 어떻게 차별화하느냐가 중요하죠.”
▷대학 교육도 바뀌어야 할 것 같습니다.
“수월성 교육을 해야 합니다. 천재들을 모아서 스스로 해결하는 법을 알려주는 교육이죠. 토론을 많이 시켜야 합니다. AI 시대에 AI보다 문제를 해결하지 못 하는 인재는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절실합니다.”
▷삶에 후회는 없으십니까.
“평생 엔지니어로 살고 있습니다. 엔지니어링의 원리는 비슷합니다. 솔루스첨단소재를 인수한 뒤 수율을 40%에서 90% 이상으로 올릴 수 있었던 것도 제가 엔지니어이기 때문이죠.”
■ 진대제 회장은…
△1952년 경남 의령 출생
△1970년 경기고 졸업
△1977년 서울대 전자공학과 졸업
△1983년 IBM 왓슨연구소 연구원
△2000년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총괄 최고경영자(CEO)
△2003년 정보통신부 장관
△2006년 스카이레이크인큐베스트 대표
△2020년 솔루스첨단소재 CEO
황정수/고은이 기자 hj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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