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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진 돌의 틈에서 시작하는 무한한 세상

입력 2025-12-10 15:42   수정 2025-12-10 15:43



“조각의 본고장에서 승부를 보고 싶었어요. 좌고우면 않고 진격했더니, 모든 조각가가 염원하는 피에트라산타에 작품을 영구설치하는 목표를 이뤘죠.”
이탈리아 토스카나주의 작은 도시 피에트라산타는 조각 예술의 성지다. 미켈란젤로, 베르니니 같은 거장들이 인근 마사카라라에서 채취된 카라라 대리석에 생명을 불어넣은 곳이다. 이 도시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는 건 모든 조각가의 꿈이다. 그런데 지난 5월 이 도시 한복판에 한국 조각가의 이름을 딴 공간이 개관했다. 세계적 건축가 마리오 보타가 설계한 ‘아틀리에 박은선’. 그의 조형세계가 일류가 됐다는 뜻이다.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치유의 공간’은 박은선(60)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기까지 추구했던 조형세계를 엿볼 수 있는 기회다. 대표작인 ‘무한 기둥’(Colonna Infinita) 연작부터 올해 작업한 3m 넘는 대형조각 ‘생성-진화’(Generation?Evoluzione)까지 22점의 조각과 19점의 회화를 선보이고 있다. 국내 대형 갤러리에서 박은선의 개인전이 열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호재 가나아트 회장이 직접 그의 작업공간이 있는 피에트라 산타까지 찾아간 끝에 전시가 성사됐다.



전남 목포에서 태어난 박은선은 경희대 조소과를 졸업한 후 1993년 이탈리아 카라라로 건너가 30년 넘게 이 곳에서 작업 중이다. 이탈리아 3대 갤러리 중 하나인 콘티니 전속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해 로마 콜로세움 앞에 작품을 설치해 눈길을 끌기도 한 그는 외국인으로는 역대 세번째 피에트라산타 명예 시민으로 위촉 받는 등 조각가로 명성을 얻고 있다.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조각의 본고장에서 이름을 알리겠다는 생각으로 버틴 끝에 ‘깨뜨리고 접합하는’ 독자적인 기법을 완성하며 인정받은 것이다.

박은선의 조각은 망치나 끌을 사용해 하나의 덩어리를 깎아내며 형상을 만들어내는 전통적인 제작 방식에서 벗어나 있다. 그는 재료를 수평으로 잘라 켜켜이 쌓은 다음 깨뜨리고 벌려가며 의도적인 틈을 만든다. 이런 식으로 번갈아 쌓아올린 서로 다른 석판들은 마치 피아노 건반처럼 독특한 리듬감을 만들어내는데, 이를 보여주는 게 전시에 나온 ‘무한 기둥’ 연작이다. 292개의 구를 천장에 설치된 스테인리스 판과 연결한 와이어에 매달아 놓은 정육면체 형태의 설치 조각 ‘Cubo’도 재밌다. 대리석 구를 반복적으로 배열해 안정감 있는 큐브를 만들었지만, 구조적 긴장감이 느껴지는 점에서다.

박은선의 조각은 최근 공공미술로 국내에서 관객과의 접점을 넓혀가는 중이다. 서울 을지로 하나은행 본사, 성수동 무신사 사옥 앞에 설치됐다. 고향인 목포 인근 신안 자은도에 그의 작품 이름을 본뜬 ‘인피니또 미술관’이 내년 10월 개관할 예정이다. 가나아트 관계자는 “박은선 작가는 유럽 무대에서 가장 주목받는 한국 조각가 중 한 명이지만, 국내에서는 아직 작품의 진면목이 충분히 체감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며 “이번 전시가 그 간극을 좁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전시는 다음달 25일까지.

유승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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