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번에는 탄소중립의 시간을 앞당기는 ‘미리 인센티브’, EPC(Environmental Progress Credit)를 소개한 바 있다. 기후테크가 미래에 달성할 탄소감축 성과를 자산으로 인정해 그 가치를 현재 투자금으로 미리 지급하는 메커니즘이다.
미래의 연봉을 담보로 대출받아 집을 사는 것처럼, EPC를 통하면 미래 탄소감축분을 담보로 현재 기후 기술이 창출하는 크레디트를 구매할 수 있다. 이에 EPC 모델이 가장 시급하게 적용되어야 할 현장,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로 시선을 돌려본다.

AI 골드러시의 그림자, ‘전기 먹는 하마’의 딜레마
바야흐로 ‘AI 전성시대’다. 누구나 챗GPT로 지브리 스튜디오풍 그림을 그리고, 프롬프트 몇 줄로 그럴듯한 수준의 보고서를 작성한다. 하지만 모든 달콤한 것에는 비용이 따르기 마련이다. 고도의 연산 능력이 요구되는 생성형 AI는 ‘전기 먹는 하마’다. 2024년 연구에 따르면 구글 검색 1회에 0.3Wh의 전력이 드는 반면, 챗GPT는 약 2.9Wh로 10배가량 더 많은 전력을 소비한다.
정부는 최근 ‘AI 자율제조 전략 1.0’을 발표하며 생산성 혁신과 인구 감소 문제 해법으로 AI를 낙점했다. 2027년까지 AI 3대 강국(G3)으로 도약하겠다는 야심 찬 목표도 내걸었다. 하지만 이 화려한 청사진에는 결정적 빈칸이 있다. 바로 에너지와 탄소다. 현재 산업 정책은 AI를 ‘어떻게 잘 쓸 것인가(활용)’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정작 그 AI를 구동하기 위해 필요한 막대한 전력을 ‘어떻게 친환경적으로 공급할 것인가(인프라)’에 대한 고민은 전력수급기본계획의 한 귀퉁이로 밀려나 있다.
산업부가 AI 산업 육성을 외칠 때, 2050 국가온실가스 감축목표(NDC)를 달성해야 하는 미션이 있는 환경부는 탄소규제를 만지작거리는 엇박자가 계속되면 한국의 AI 데이터센터가 ‘전기 먹는 하마’라는 오명 속에 갇혀 성장의 발목을 잡힐지도 모른다.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통상적으로 전력 사용을 제한하는 ‘규제’나 세금을 투입하는 ‘보조금’ 카드를 꺼내 든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산업을 규제로 억누를 수도, 천문학적 전환 비용을 일회성 지원금으로 모두 감당할 수도 없다. 결국 이해관계자를 자발적 성장으로 움직이게 할 새로운 동력, 즉 금융 시스템으로의 근본적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
성장과 탄소중립: AI 산업이 마주한 양날의 검
AI 산업의 연료는 전기다. 따라서 AI 산업 탄소배출의 핵심은 전력 생산 과정인 ‘스코프 2(간접배출량)’에 집중된다. 탄소중립 목표를 지닌 기업들은 RE100 선언이나 전력구매계약(PPA) 등을 통해 이를 해결하려 하지만, 재생에너지 공급 부족으로 한계에 부딪힌다. 결국 해법은 ‘같은 효율을 내면서 전기를 덜 쓰는 것’, 즉 설비 자체의 효율화다.
물론 기업들도 효율적인 서비스 공급을 위해 저전력 반도체 등 다양한 방법을 고민한다. 하지만 ‘비용’이라는 현실적인 벽에 부딪힌다. 비용 효율성만 따지면 적당한 성능의 저전력 반도체를 쓰는 것이 합리적이다. 탄소중립을 위해 더 비싼 초저전력 반도체를 쓰라고 강요할 수 있을까? 기업에 무한한 희생을 요구할 수는 없다. 탄소중립을 위한 고비용 투자를 정당화할 실질적 명분과 금융적 인센티브가 필요하다. 사회적가치연구원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EPC 메커니즘을 제안한다.

미래의 절감분을 ‘오늘의 투자금’으로
미래 AI 데이터센터의 탄소감축 핵심은 결국 ‘전력 다이어트’다. 사회적가치연구원은 향후 AI 데이터센터 모델로 기존 대비 고효율·저전력 GPU를 도입하거나, 자체 태양광발전 설비를 구축하는 형식을 제안하고자 한다. 이 모델을 도입할 경우 데이터센터의 전력 사용량 자체를 줄일 수 있으며, 이로 인해 회피하거나 감축한 탄소배출량에 대해 배출권거래제(ETS)에서 거래할 수 있는 잉여배출권(KAU)이 발생한다.
이때 중요한 포인트는 자금조달 방식과 시점이다. 기존 기후금융 투자 방식은 주로 사후에 발생한 자발적 탄소감축에 대해 크레디트를 발행하고 이를 거래해왔다면, 본문에서 제안한 방식을 도입한 AI 데이터센터 건설은 미래에 발생할 탄소감축량을 미리 산정하고 사전에 크레디트로 발행하는 것이다. 지난번 기고에서 제안한 EPC 메커니즘을 적용하면 AI 데이터센터 사업자는 향후 10~15년간 발생할 미래의 탄소감축 성과를 담보로 ‘사전 금융(upfront financing)’을 일으킬 수 있다. 즉 막대한 초기 건축비를 미래 성과로 조기에 마련할 수 있다.
민간이 먼저 뚫은 길, 후시파트너스의 ‘미래배출권’
혹자는 묻는다. 미래의 불확실한 감축 성과를 담보로 자금을 빌려주는 것이 한국 시장에서 가능하느냐고. 답은 ‘그렇다’다. 비록 타깃 산업군은 다르지만, 한국 민간 시장에서는 이미 의미 있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기후 핀테크 스타트업 후시파트너스는 운수 회사가 디젤버스를 전기버스로 교체할 때 겪는 ‘초기 비용 장벽’에 주목했다. 이들은 전기버스로 교체 시 향후 10년간 발생할 온실가스 감축량을 정부 인증(외부사업)을 통해 정량화하고, 이를 ‘미래 탄소배출권’이라는 자산으로 유동화했다. 미래에 생길 배출권을 담보로 투자자로부터 자금을 미리 조달해 운수 회사에 버스 구매 보조금 형태로 선지급하는 구조다. 이 모델은 운행 노선이 고정되어 일일 운행 거리가 일정한 시내버스를 대상으로 미래 탄소감축 성과를 사전에 산정했다.
2022년 국내 최초로 국토부 외부사업 방법론 인가를 받았고, 2024년에는 20억 원 규모의 시리즈A 투자를 유치하며 시장성을 검증받았다. 운수 회사는 초기 부담 없이 전기차를 도입하고, 투자자는 안정적 배출권 수익을 확보하는 ‘윈윈’ 모델이다. 실제로 투자자인 현대차증권은 전기버스 33대의 약 1년 치 저감 효과에 해당하는 1345 tCO2-eq를 인증받았으며, 향후 지속적인 모니터링을 통해 사업 기간 연평균 약 930tCO2-eq의 추가 감축 실적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러한 투자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탄소배출권을 선확보한다. 제4차 ETS 시행과 함께 정부가 탄소배출권 가격을 현재 대비 지속적으로 상승시킬 의지가 있는 현실을 비추어볼 때 매력적인 투자 방안이다.
비록 아직은 소규모 거래인 데다 ETS 시장에서 거래할 수 있는 자산에 한정해 미래 배출권이 발행되긴 했지만, 이 사례가 시사하는 바는 크다. 민간 시장이 이미 미래의 환경성과를 ‘돈이 되는 자산’으로 인식하고 거래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는 미래가치를 현재로 당겨와 탄소중립의 시급성을 해결한다는 EPC의 철학이 시장에서 일부 증명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미래 배출권 거래 메커니즘을 저전력 AI 데이터센터 건설 과정에 도입하면 ‘비용 장벽’ 때문에 주저하던 저전력·저탄소 AI 데이터센터 확산을 획기적으로 앞당길 수 있다.
혼자가 아닌 함께, ‘얼라이언스’가 필요한 시점
이 거대한 프로젝트는 개별 기업이 수행하기는 어렵다. 탄소감축 기술을 가진 기업(Tech)과 그 감축 성과가 필요한 기업(Buyer)이 뭉쳐야 한다. 해외에서는 이미 이러한 기업 공동체 움직임이 활발하다.
대표적 예로 알파벳, 메타, 맥킨지 등이 결성한 ‘프론티어(Frontier)’가 있다. 이들은 약 9억2500만 달러(약 1조 원) 규모의 기금을 조성해 영구적 탄소제거 기술 기업의 크레디트를 ‘선구매(Advance Market Commitment)’하는 방식으로 초기 시장을 지원한다. 또 구글, 메타, 마이크로소프트(MS) 등이 결성한 ‘심바이오시스(Symbiosis) 연합’은 2030년까지 최대 2000만 톤의 자연 기반 탄소제거 크레디트를 공동구매하기로 약정했다.
우리도 SKT, 네이버 등 AI 선도 기업을 주축으로 한 ‘K-AI 얼라이언스’를 구축하는 것이 어떨까. 이들이 뭉쳐 거대한 전력 소모를 감축할 방안을 고민하고, 공동으로 기후테크를 도입하며, 나아가 미래의 크레디트를 선구매한다면 어떻게 될까. 데이터센터 사업자와 기후테크 사업자들은 자금조달 리스크 없이 과감하게 저전력 기술에 투자할 수 있다. 물론 이 얼라이언스에는 기업뿐 아니라 크레디트 수요처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할 정부와 활용 방식을 감시하고 제언해줄 시민사회가 함께해야 한다. 그래야 얼라이언스의 투명성과 성과가 더 커질 것이다.
규제의 채찍보단 금융이 마중물 되어야
우리는 흔히 탄소중립을 ‘비용(cost)’으로, AI 성장을 ‘수익(benefit)’으로 구분해 생각한다. 하지만 EPC 관점에서 보면 이 둘은 대립하지 않는다. 탄소를 줄이는 행위 자체가 자산이 되어 성장의 재원이 되기 때문이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민간 시장에서는 기존에 존재하던 ‘사후 탄소감축 성과’를 넘어 이제 ‘미래 탄소감축 성과’에 대해 거래하는 것을 고민하고 있다. 이제 정부도 탄소중립에 대한 시야를 더 넓혀야 한다. 행동 방식 측면에서는 감축하지 않으면 벌금을 물리는 ‘심판’ 역할에서, 기업이 미래 성과를 담보로 과감하게 기술에 투자할 수 있도록 보증을 서고 판을 깔아주는 ‘후원자’ 역할로 전환해야 한다. 규제가 기업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아니라 새로운 시장으로 나아가는 나침반이 되게 하는 것이야말로 EPC가 그리는 기후 금융의 미래다.
또 시계열 측면에서는 탄소중립 예산을 투입하는 방식도 현재 성과와 미래 성과를 모두 다룰 수 있는 방향으로 진화해야 한다. 이러한 방식의 변화가 실현될 때, 앞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할 AI 산업 부문의 탄소중립 시계는 지금보다 훨씬 빨라진다. 사람들은 미래에 실현될 탄소감축 성과를 오늘 거래하게 되는 EPC라는 엔진을 통해 탄소 시장 내에서 더 활발히 움직일 것이다.
물론 과제는 남는다. 수많은 데이터센터의 미래 탄소감축량을 어떻게 개별적으로 정량화하고, 복잡한 금융 상품을 발행하며, 투명하게 거래·정산할 것인가. 그 해답은 기술에 있다. 이어지는 다음 기고에서는 이 모든 구상을 현실화할 기술적 토대, 블록체인 기반 MRV(측정·보고·검증) 시스템의 발전 방향을 다뤄보고자 한다.
정명은·허승준·고민정·이택준 사회적가치연구원 연구원
사회적가치연구원
SK그룹이 2018년에 설립한 비영리재단법인. 기업의 사회(환경)적 가치 활동이 기업의 자산가치로 인정받는 시장 메커니즘을 구상하는 연구를 수행 중이다. 이를 위해 사회·환경문제 해결 성과의 화폐적 측정방법론 개발, 보상 실험, 회계 연구, 정부 정책 및 거래 제도 개발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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