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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킬만 있는 '칼 잡은 원숭이' 안돼…칼보다 책부터 잡은 요리사

입력 2025-12-11 16:55   수정 2025-12-12 02:24

지난해 넷플릭스 ‘흑백요리사’에서 우승한 뒤 ‘나폴리 맛피아’ 권성준 셰프(30)의 삶은 단 1년 만에 극적으로 달라졌다. 이름 모를 ‘흑수저’에서 각종 방송·협업 요청이 쏟아지는 ‘스타셰프’가 된 것이다. 벼락출세처럼 보이지만 그 뒤엔 맨몸으로 부딪혀가며 벼려온 20대의 시간이 길게 깔려 있다.

꿈 없이 무기력하던 10대를 지나 호텔조리학과에 입학한 그는 스위치를 켠 듯 요리에 인생을 걸었다. 한식·중식·양식·일식, 제과·제빵, 조주, 커피, 와인, 차까지 자격증 10종을 취득했고, 이탈리아 유학과 미쉐린 레스토랑 스타지(무급 인턴)를 거치며 기본기를 다졌다. 서울의 작은 버거집에서 헤드셰프로 사업 실전을 익혔고, 스물여섯에는 자신의 식당 ‘비아 톨레도 파스타바’를 열었다. 그렇게 거침없이 달려온 20대 끝에서 그는 ‘흑백요리사 우승’이라는 화룡점정을 찍었다.

그리고 서른이 된 올해, 첫 책 <나폴리 맛피아 시크릿 레시피>를 펴냈다. 지난 10년을 돌아보고 ‘인생 요리’ 31개를 정리한 에세이 겸 레시피북이다. 서울 용산구 비아 톨레도 파스타바에서 그를 만났다.


▷책은 처음 썼는데 어땠습니까.

“글 쓰는 게 꽤 재미있더라고요. 앞으로도 매년 한 권씩 책을 내보고 싶어요. 레시피북이 아니어도 계속 글을 쓰고 싶습니다.”

▷책에 실린 메뉴 중 ‘이건 꼭 만들어보라’고 추천하고 싶은 요리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이스키아식 토끼 파스타’를 꼭 한번 만들어 보셨으면 해요. 토끼는 나폴리에선 흔히 쓰는 만큼 독자들이 이런 식재료를 경험해보면 좋겠습니다. 토끼 고기는 온라인에서도 구할 수 있습니다.”

▷흑백요리사 우승 이후 1년이 지났는데 달라진 점이 있습니까.

“크게 없습니다. 여전히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혼자 공부하거나 고양이와 지내는 시간이 편합니다. 달라진 건 주변이죠. 대기업 총수, 유명 연예인, 스포츠 선수 등 우승 이후 각 분야 최정상을 많이 만나면서 오히려 겸손을 배웠어요. ‘나는 우승 한 번 한 사람일 뿐’이라는 걸 절실히 느꼈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도 생겼죠.”

▷요리를 시작한 계기를 ‘만화처럼 전구가 번쩍한 순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요리나 해볼까?’라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고 잘될 것 같았다고요.

“수능 뒤 적성고사를 준비하려고 학원에서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요리’를 떠올렸어요. 저는 그런 ‘감’이 좋은 편인 것 같아요. 내가 잘할 수 있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차리는 순간이 종종 있고 실제로 잘 풀리기도 했어요. 요리를 선택한 것도, 해외에 나가기로 한 것도 비슷해요. 돌이켜보면 운명처럼 흘러간 것 같습니다.”

▷대학 때 식음료 자격증 10종을 땄다고 들었습니다.

“자격증이 많다고 특별히 대접받거나 월급이 오르는 건 아니지만 중·고등학교 때 허송세월을 많이 보냈다는 자각이 있어 ‘시간 낭비’를 못 견디게 됐어요. 한두 달 빈틈이 생기면 바로 자격증을 공부했습니다. 좋아하는 걸 찾았으니 시간을 버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했죠. 일, 공부, 요리밖에 없었어요. 친구도 거의 없고, 가족과도 시간을 많이 못 보냈고요. 클럽도 안 가고 술·담배와 게임도 안 하고 오로지 요리에만 집중했어요.”

▷이탈리아에서 1년 반 유학했습니다. 어떤 요리사가 되고 싶었습니까.

“파인다이닝·미쉐린 셰프가 걷는 정석을 따라가고 싶었어요. 유럽과 남미 미쉐린 식당을 돌며 배우는 것이 당연한 코스처럼 여겨지던 때라 그 흐름에 맞춰 경험을 쌓고 한국에서 가게를 열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19가 터져 모든 계획이 중단됐고 다시 방향을 고민해야 했습니다.”

▷서울 연남동 한 버거집에서 처음 헤드셰프 겸 총책임자를 맡았습니다.

“귀국 후 직원으로 일할지, 가게를 차릴지, 해외를 다시 노릴지 고민 중이었는데 국내 파인다이닝 환경이 저와 맞지 않아 캐주얼한 업장의 헤드셰프로 들어가 봤어요. 사장님이 요식업 경험이 없어 메뉴 개발부터 직원 채용, 운영까지 사실상 모든 걸 제가 맡았어요. 빵, 패티, 소스도 직접 만들며 파인다이닝에서 배운 운영 방식을 적용했더니 가게가 잘됐고요. 1년 반 동안 운영을 책임지면서 ‘나도 사업을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2021년엔 오너셰프로 식당을 냈습니다. ‘철저하게 다른 파스타 바’를 열기 위해 치밀하게 개업 전략을 짰다고요.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건 ‘지피지기’라고 생각해요. 내가 잘하는 것뿐 아니라 시장 흐름과 소비자 반응을 먼저 파악해야 하죠. 블로그 리뷰, 예약 데이터, SNS 반응을 꾸준히 살펴 패턴을 읽었습니다. 어떤 콘셉트와 이미지로 경쟁력을 갖출지도 끝까지 따졌죠. 단순히 ‘이 음식 잘하니 가게를 차리자’는 식으로 접근하면 실패할 확률이 높습니다.”

▷코로나19 시기에는 식당이 잘됐다가 코로나19가 종식되자 급격히 어려워졌다고 했습니다. 때마침 흑백요리사 출연 기회가 찾아왔다고요.

“코로나19 때는 돈이 많이 풀리고 소비가 국내에 몰리며 파인다이닝이 오히려 호황이었어요. 하지만 팬데믹이 끝나고 금리가 오르자 분위기가 급격히 식었어요. 사람들이 외식비부터 줄이기 시작하면서 2023년이 가장 힘든 시기였죠. 이 흐름이면 곧 식당도 자리가 비겠다 싶었고 실제로 가게를 접을 수도 있었어요. 다른 직업까지 고민하던 상황이었는데 출연 제안이 왔죠.”

▷“좋은 요리사가 되려면 칼이 아니라 책부터 잡아야 한다”는 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해외 요리 서적을 모았다고 하는데, 기억에 남는 책은 무엇입니까.

“요리는 육체노동이라 스킬만 익히면 된다는 오해가 있는데, 공부 없이는 한계가 있어요. 몸만 움직이고 머리가 비어 있으면 ‘칼 잡은 원숭이’가 돼요. 도움이 된 책은 해럴드 맥기의 <음식과 요리>예요. 음식의 과학적 원리를 이해하게 해준 책으로, 머리로 먼저 이해하고 손이 따라가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 두세 달마다 메뉴를 바꾼다던데 창작이 막힐 때 어떻게 극복합니까.

“영감은 결국 ‘양치기’예요. 많이 보고 넣어야 나옵니다. 전시, 클래식 공연 등 다른 예술 분야를 꾸준히 찾아요. 당장 요리로 연결되지 않아도 작가의 생각과 시대·환경을 간접 경험하다 보면 그게 쌓여서 어느 순간 흘러나옵니다. 요리만 들여다보면 한계가 생기기 때문에 다른 분야 창작물을 많이 흡수하려고 합니다.”

▷미쉐린 스타를 받고 싶은 욕심도 있습니까.

“그런 욕심은 전혀 없어요. 미쉐린은 요리 실력 외에 행사, 네트워크 등 외부 요소가 많이 필요한데 제 성향과 맞지 않습니다. 직원을 많이 둬야 하고 투자 규모도 커져야 합니다. 한국 미쉐린 레스토랑 대부분이 투자를 받아 운영되는 것도 그런 구조 때문이고요. 저는 투자받기보다 작은 규모를 제 힘으로 자유롭게 운영하는 방식을 선호합니다. 직원이 많아지는 것도, 사람이 많은 환경도 원하지 않아요. 제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자유로움이에요. 또 제가 만드는 음식과 운영하는 식당이 스스로 떳떳해야 하고, 직원들도 자부심을 느끼길 바라요. 외부 타이틀에는 관심 없어요. 미쉐린 별을 받았어도 실제 가져가는 수익은 거의 없는 경우도 많아요. 물론 예술적 가치와 명예는 인정하지만 제 기준에서 사업이 적자면 그건 실패한 비즈니스예요.”

▷30대에 들어서며 “책이 출간될 즈음 고민을 멈추고 확신을 가진 채 나아가고 있기를 바란다”고 썼습니다.

“예전부터 주변에 ‘35세 때 은퇴하겠다’고 말해왔어요. 지난 10년을 거의 일에만 쏟으며 달려왔거든요. 앞으로 4년만 더 집중하고 그 후엔 조금 내려놓고 살고 싶습니다. 은퇴가 요리를 완전히 그만둔다는 뜻은 아니지만, 지금처럼 성장 욕구에 모든 시간을 쏟아붓는 방식을 벗어나겠다는 의미에 가까워요. 35세 이후엔 제 시간도 갖고 사람들도 만나며 좀 더 ‘일반적인 삶’을 살아보고 싶습니다. 그때까지 오늘 하루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낭비 없이 충실하게 살아야죠.”

설지연 기자 sj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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