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전선(중국)은 1000억달러 펀드를 만들었고, 동부전선(미국)은 530억달러 보조금을 쏟아붓고 있습니다.”지난 10일 대통령실에서 열린 ‘K-반도체 비전과 육성 전략 보고회’에서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의 목소리는 비장했다. 그는 “1차 전쟁이 모바일, 2차 전쟁이 데이터센터발(發)이었다면 3차 반도체 전쟁은 인공지능(AI) 패권을 둘러싼 국가 총력전”이라고 강조했다.
반도체산업이 ‘전시(戰時)’라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K반도체는 ‘고대역폭메모리(HBM) 착시’로 위기를 인지하지 못한다는 평가가 많다. 설계(팹리스)는 미국에, 파운드리(수탁생산)는 대만에, 소재·부품·장비는 일본에 밀린다. 여기에 중국은 막대한 자본으로 구형 공정부터 포위망을 좁히고 있다. ‘세계 2강’ 달성은커녕 유럽과 중국 등이 ‘자국 생산’을 강화한다면 K메모리 점유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나온다.
경쟁국들은 AI 패권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보조금 살포를 불사하고 있다. 미국은 칩스법(CHIPS Act)으로 기업에 천문학적인 보조금을 약속했고, 일본 정부는 구마모토 TSMC 공장 건설비의 절반을 대는 파격 조치를 단행했다. 그래서 김 장관이 ‘우리나라는 반도체에 2조원, 즉 20억달러가 안 되는 돈이 투입된다’고 토로한 대목은 뼈아프다. 이 2조원은 반도체특별법에 따른 반도체 특별회계 자금으로 클러스터의 전력·용수·도로망 확충과 연구개발(R&D) 등 ‘간접 지원’에 쓰인다. 이 정도론 경쟁국의 직접 보조금에 대응하긴 어렵다. 그나마도 반도체·배터리 제품에 생산세액공제를 해주는 ‘한국형 인플레이션 감축법’은 국회 문턱에 걸려 지지부진하다.
반도체업계는 이날 토론회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규제 혁파’를 강조한 데 대해 고무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용인 클러스터 공장에 “전력이 얼마나 부족하냐”고 물으며 기업 현장의 애로사항에 구체적인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부 해법은 ‘조건부’에 그쳤다. 송전망 건설이 어려우니 전력이 남는 지방에 투자하고, 이를 전제로 규제(주 52시간 근무제·금산분리)를 완화해주겠다는 것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글로벌 경쟁사들은 생존을 위해 전력 질주하는데, 우리 정부는 모래주머니를 차고 뛰라는 격”이라고 꼬집었다.
정부는 “2047년까지 700조원의 반도체 투자가 이뤄질 것”이라고도 강조했다. 그러나 이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예고한 증설 투자를 나열한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이다. ‘국가 총력전’이 필요하다고 외친 정부가 정작 기업에 ‘총알(보조금)’은 쥐여주지 않고 전장으로 내모는 게 아닌지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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