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20세기 작곡가를 꼽는다면 라흐마니노프가 빠질 수 없다. KBS 클래식FM이 2015년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클래식’을 주제로 설문한 결과에서도 1위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었다.책 <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는 망명인으로서의 라흐마니노프를 다룬다. 그가 1917년 고국을 떠나 노르웨이, 미국을 돌며 작곡한 작품은 단 여섯 개뿐. 그간 라흐마니노프를 다룬 서적들이 러시아에서의 이야기에 집중한 이유다. 이 책은 거꾸로 라흐마니노프가 공산 정권에서 벗어나려 했던 순간부터 서사를 시작한다. 러시아혁명의 열기와 망명의 긴박함을 묘사하는 라흐마니노프의 편지에선 영화를 보는 것 같은 현장감이 느껴진다.
책 전반을 관통하는 소재는 망명 시절 가까이 한 인연들과 고국을 향한 그리움이다. 라흐마니노프는 영어보다 프랑스어나 독일어가 편했다. 영어에 서툰 그가 러시아에서 망명 온 이들과 주로 어울릴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다. 미국에서 그는 작곡 대신 피아노 공연에 힘을 쏟았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고국 음악가를 아낌없이 후원했다. 책 곳곳엔 라흐마니노프가 프로코피예프, 글라주노프, 허스트 등 당대 음악가와 나눈 진솔한 편지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저자 피오나 매덕스의 담담한 서술도 읽는 재미를 더한다. 그는 클래식 음악 잡지인 ‘BBC 뮤직 매거진’의 창간 편집자를 맡으면서 식견을 입증한 평론가이자 기자다. 매덕스는 짧은 문장으로 채운 간결한 문체로 독서에 속도감을 더했다. 생소한 지명이나 인명에 헤매는 이들도 집중력 있게 읽어나가기 좋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노변담화와 같은 사건을 곁들여 역사적 맥락을 놓치지 않으려 한 저자의 섬세함도 눈에 띈다.
에필로그에 있는 라흐마니노프의 유산에 대한 묘사는 너무나 담담해 되레 여운이 남는다. 말년의 그가 건강이 나빠져 소화할 수 없었던 공연 일정들은 다른 피아니스트가 메꿨다. 클라우디오 아라우,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등 앞으로 명성을 드높일 음악가들이 라흐마니노프를 대신해 무대에 올랐다. 그가 나이 예순아홉에 죽기 직전 받은 생일 축하 메시지엔 당대를 대표하는 러시아 음악가들의 서명이 빼곡해 라흐마니노프의 죽음에 남다른 무게감을 더한다.
라흐마니노프가 남긴 곡들은 한국의 연말을 채웠다. 11, 12일엔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경기 필하모닉과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을 협연했다. 피아니스트 신창용은 오는 17일 지휘자 홍석원이 이끄는 한경아르떼필하모닉과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한다. 뮤지컬 <라흐마니노프>도 14일까지 상연된다. 익숙한 라흐마니노프의 멜로디를 독서와 함께 새로 해석할 기회다.
이주현 기자 dee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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