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결한 발레 동작 하나하나에도 무용수의 연습량과 혼이 담겨 있다. 그 응축된 움직임을 정지된 순간으로 담아낸다면 어떤 인상일까. 국립발레단이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이달 11~18일 여는 전시인 ‘스틸 인 모션’은 사진가 여섯 명의 작품으로 발레를 풀어낸다. 발레를 다른 예술 장르로 조금 더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자리다.
이 사진전의 총괄감독은 디자이너 정윤민. 그는 발레 무대 의상뿐 아니라 클래식 음악가들의 의상을 책임져온 드레스 디자이너다. 2017년 국립발레단의 창작발레 ‘허난설헌-수월경화’에 나오는 의상 수십 벌을 일일이 디자인하면서 무용계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지난 10일 예술의전당에서 만난 정 감독은 “발레를 모르던 분도 색다른 방식으로 발레와 익숙해질 수 있도록 이번 전시를 기획했다”고 밝혔다.
스틸 인 모션은 발레와 사진이라는 두 예술을 결합해 새로운 미학을 선보이겠다는 정 감독의 바람과 새로운 시도를 계속하려는 강수진 국립발레단 단장의 뜻이 만나 성사됐다. 전시는 ‘카멜리아 레이디’ ‘인어공주’ ‘안나 카레리나’ 등 발레 대표 레퍼토리 일곱 개를 주제로 무용수들의 다채로운 모습을 담았다.
정 감독은 홍장현 김희준 등 사진작가 여섯 명에게 각자 한두 개씩 레퍼토리를 맡도록 했다. 그는 “발레 작품 ‘지젤’에 등장하는 ‘꽃’과 같은 오브제를 살리되 표현은 사진가 재량에 맡겼다”며 “무용수의 실루엣, 안무 서사, 의상과 빛의 조화 등 사진작마다 눈여겨보는 지점이 작품별로 달랐다”고 설명했다.
예컨대 카멜리아 레이디를 주제로 한 홍 작가의 사진은 강 단장이 가운데 있고 다른 발레리나 네 명이 얼굴과 몸을 맞대고 있는 구도다. 홍 작가는 흑백으로만 색감을 잡아 이들 발레리나의 표정이 도드라지도록 했다. 별개의 프레임으로 담아낸 발레리나들 손엔 서로의 손길을 갈구하는 연대의 몸짓이 담겨 있다.
전시작 중엔 정 감독이 가장 각별하게 여기는 허난설헌-수월경화의 의상도 있다. 정 감독은 허난설헌의 한시인 ‘몽유광상산’에 등장하는 난새(鸞)를 모티프로 여러 색이 층층이 쌓여 있는 치마폭을 구현했다. 정희승 작가는 발레리나의 앙상한 실루엣과 잔근육을 살려 허난설헌의 섬세함과 굴곡진 삶을 표현했다.
정 감독은 음악계에서도 명성이 자자하다.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예술고등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맨해튼 음대에 입학한 음악 인재였다. 그러다 돌연 의류경영으로 진로를 틀었다. 옷감 장사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들었던 길은 예술가의 옷을 만들고 싶다는 소망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2013년 만든 바이올리니스트 신지아의 옷을 보고 정경화가 영국 런던 로열페스티벌 홀에서 입을 의상을 주문했다. 지금은 정경화가 ‘소울메이트’(영혼의 친구)라고 부를 정도로 서로 각별한 사이가 됐다.
지난 6월 프랑스 파리 에펠탑 아래에서 열린 공연인 ‘르 콩세르 드 파리’에서 활약한 김봄소리도 정 감독이 제작한 노란 드레스를 입었다. 공연 전 주에 의뢰를 받은 정 감독이 닷새 만에 만든 작품이었다. “제가 디자인할 때 보는 건 세 가지, 음악, 존재감, 그리고 캐스팅된 무대의 특수성이에요. 연주자가 동양에서 온 작은 요정처럼 보이면서도 우아함을 겸비했으면 했죠.”
디자인에 앞서 그는 연주자를 철저히 공부한다. 연주자의 무대 영상을 모두 살펴보고 음악을 계속 듣는다. “성악을 공부한 게 연주자의 감정 흐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돼요. 예술가가 갖는 섬세함이나 감정의 서사를 읽는 힘이 생긴 거죠.”
많은 아티스트가 앞다퉈 의상을 맡기는 이유에 대해 정 감독은 “깊은 공감”을 꼽았다. “아티스트들이 의상에 신경을 더 안 쓰게 하고 싶어요. 의상이 음악과 춤에 거리낌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게 항상 먼저죠. 그들이 왜 이 음악과 춤을 하는지 생각하며 인간적인 부분도 이해하려고 합니다.”
이주현 기자 dee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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