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11일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싱가포르 테마섹과 호주 퓨처펀드를 본뜬 ‘한국형 국부펀드’ 설립 계획을 밝히면서 제2의 국부펀드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외환보유액을 운용하는 한국투자공사(KIC)가 있는데, 별도의 국부펀드를 조성하는 목적과 실현 가능성에 대해 다양한 관측과 평가가 나오고 있다. 금융시장 전문가들은 ‘국부의 체계적인 축적과 미래 세대 이전’이란 취지에는 대체로 공감하면서도 투자 목적과 원칙, 재원, 지배구조 등을 세밀하게 설계하지 않으면 부작용만 낳을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국부펀드의 원조는 1950~1960년대 설립된 쿠웨이트투자청(KIA), 아부다비투자청(ADIA) 등 중동 국부펀드다. 이들 국가는 영국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초기부터 재정의 과도한 원유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국가 주도의 펀드 설립에 적극적이었다.
세계 최대인 노르웨이 국부펀드(NBIM)도 설립 목적이 비슷하다. 1969년 북해 앞바다에서 세계 최대 규모의 에코피스크 유전이 발견되자 노르웨이 정부는 네덜란드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네덜란드는 1959년 북해상에서 발견된 가스전으로 대박을 터뜨렸다. 하지만 천연가스 수출 대금이 대거 유입되면서 통화 가치와 물가가 급등하고, 제조업 수출 경쟁력이 붕괴하는 ‘자원의 저주’에 시달렸다.
노르웨이 국민들은 유전 수익을 현세대가 써버리는 대신 미래 세대를 위해 축적하기로 합의했다. 1990년 ‘석유기금법’을 제정해 석유와 천연가스 수익을 일반 재정에 넣지 않고, 국부펀드에 적립했다. NBIM이 오늘날 2조441억달러를 굴리는 세계 최대 국부펀드로 성장한 덕분에 노르웨이는 오늘날 세계에서 1인당 국민소득이 가장 높은 나라 가운데 하나가 됐다.
우리나라에도 KIC라는 국부펀드 운용 회사가 있다. 수출로 벌어들인 외환보유액을 해외에 투자해 안정적으로 운용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2005년 기재부와 한국은행으로부터 1180억달러를 위탁받아 시작한 KIC의 운용자산은 지난 9월 말 현재 2276억달러로 불어났다.
한 전직 KIC 최고투자책임자(CIO)는 “KIC의 경우 전 세계 상장 주식, 채권, 대체자산에 분산 투자를 하다 보니 전략적 목적으로 쓸 여지가 없다”며 “한국같이 자원 없이 사람과 기술로 성장한 국가에서는 좀 더 전략적인 목적의 국부펀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가 싱가포르 테마섹을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원유 같은 재원 없이 자국의 국부펀드를 세계 10위권으로 키운 나라가 싱가포르이기 때문이다. 1974년 공기업 35곳의 자산 2억달러로 설립한 테마섹의 운용자산은 현재 3360억달러로 불어났다. 비자, 마스터카드, 블랙록, 텐센트 같은 우량 글로벌 기업에 투자해 꾸준한 수익률을 유지한 덕분이다. 테마섹에 정통한 한 싱가포르 상무관 출신 전직 관료 A씨는 “인공지능(AI), 양자컴퓨터 등 기술 패권 경쟁 시대를 맞아 해외 첨단기술산업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도 국부펀드가 필요하다”며 “세계 유력 기업들이 대형 국부펀드에 투자해 달라며 정보를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NBIM은 정부가 자산 배분 비율만 결정할 뿐 개별 투자는 100% 내부 전문가들의 결정 사항이다. 테마섹은 싱가포르 정부가 소유만 할 뿐 경영에는 일절 개입하지 않는다. 호주 퓨처펀드도 투자위원회의 독립성을 법으로 보장하고 있다.
A씨는 “테마섹 고위 관계자에게 성공 비결을 물었더니 ‘테마섹 출신 전문가가 정치권으로 진출하는 경우는 있어도 정부나 정치권에서 테마섹에 낙하산을 내려보내지는 못한다’는 답이 돌아왔다”고 말했다. 전 KIC CIO도 “노르웨이와 호주, 싱가포르의 국부펀드들은 오랜 시행착오 끝에 정치권의 개입을 철저히 배제하는 시스템을 제도화한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다”며 “한국형 국부펀드가 정치권의 낙하산과 관료들의 자리 나눠 먹기 수단이 되는 순간 실패는 예정된 것”이라고 말했다.
자산 운용의 전문성은 독립성만큼 어려운 과제다. 전문성을 결정하는 것은 인재인데, 우리나라는 정부 기관에 최고의 전문가를 비싼 몸값을 주고 데려온 전례가 없기 때문이다. 테마섹은 내부 승진 경쟁을 없애는 대신 오직 돈으로만 성과를 보상한다. 국부펀드는 아니지만, 연기금 가운데 최고의 수익률을 유지하는 캐나다연금투자위원회(CPPIB)는 골드만삭스와 블랙스톤 같은 각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로 내부 운용 조직을 채운다. 경쟁사에 비해 부실한 처우 때문에 KIC와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에서 매년 우수한 운용인력이 빠져나가는 것과 대조적이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보건복지부 등 주무부처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고, 연기금·공제회의 최고경영자(CEO)와 CIO가 2~3년마다 바뀌는 우리나라 풍토에서는 전문성을 키우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투자 목적과 대상이 분명치 않은 점도 한국형 국부펀드의 한계로 지적된다. 정부가 테마섹과 함께 벤치마크 대상으로 삼은 호주 퓨처펀드의 경우 자원 호황 당시 벌어들인 재원으로 공무원 연금의 막대한 부채를 갚는다는 목표로 설립됐다.
익명을 요구한 한 경제학자는 투자 대상과 관련해 “국내 기업 중심으로 투자하면 국민연금과 함께 연못 속의 고래가 될 우려가 크고, 해외에 투자한다면 달러 유출로 또 하나의 원화 약세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정영효/남정민 기자 hug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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