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각종 현대미술 단체전과 비엔날레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주제가 ‘남성 위주 사회’, ‘백인 중심의 역사인식’ 비판이다. 오랫동안 사회의 주류로 군림해온 백인, 남성의 시각을 비(非)백인, 비남성 시각의 작품으로 뒤흔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림을 팔아야 하는 갤러리 입장에서는 이런 상업성이 덜한 작품이 다소 부담스럽다. ‘보기 좋은 작품’에 대한 선호가 특히 강한 국내 미술시장에서는 더욱 그렇다.
국내 최대 화랑인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가 올해 마지막 전시의 주인공으로 장파(본명 장소연·44), 다니엘 보이드(43)를 선택한 것을 놓고 미술계의 관심이 쏠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의 여성주의 작가인 장파는 노골적이고 그로테스크한 그림으로 남성 중심 사회를 비판하는 작가, 보이드는 한국에서 다소 생소한 호주 원주민 혈통 작가 입장에서 백인 위주의 역사를 비판하는 작가다.

피 칠갑한 내장으로 뒤집는 고정관념
국제갤러리 K1과 K2(1,2관)는 장파의 작품이 채웠다. 전시 제목은 ‘고어 데코(Gore Deco)’다. 잔혹하고 역겨운 것을 뜻하는 ‘고어’와 장식을 뜻하는 ‘데코’를 합쳐 만든 말이다. 그 말대로 전시장 곳곳은 선홍색을 띤 신체와 내장 그림으로 가득하다.
서울대 서양화과 00학번인 장파는 20대 초부터 인터넷에서 떠도는 여성 혐오 표현에 주목해왔다. 그는 “발달장애를 가진 가족과 함께 성장하며 계급·성별·장애에 따른 폭력을 종합적으로 체감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작품을 통해 정면으로 이 같은 폭력에 맞선다. ‘문신, 담배, 피어싱’이 단적인 예다. 작품 속 여성의 내장에는 문신과 피어싱이 돼 있고, 입에 해당하는 곳에는 담배가 물려져 있다. 여성에 대한 편견을 상징하는 이 요소들을 통해 작가는 여성의 몸을 성(性)적인 대상이 아니라 자유롭게 행동하는 ‘주체’로 표현한다.

전시장 전체에 깔린 파스텔톤 분홍색은 과거 남성 중심 사회에서 ‘소녀 취향’이라며 유치하게 여겼던 색을 의도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림 속 신체 장기들이 기괴하게 뒤섞인 건 프랑스 철학자 조르주 바타유의 영향. 아름다운 꽃도 얼핏 더러워보이는 흙에 뿌리내려 자라는 것처럼, 바타유는 성스러운 것과 추한 것을 모두 알아야 비로소 세상이 보인다고 주장했다. 장파는 “고상함과 저속함의 경계를 무너트려 여성의 몸을 새롭게 보도록 했다”고 말했다.
K1관 입구 쪽 전시관에 있는 그로테스크한 흑백 드로잉 작품, 여러 캐릭터와 장식 등이 있는 벽면 곳곳의 장식을 눈여겨볼 만하다. 일반적인 아름다움과 거리를 둔 강렬한 작품들이 많아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구멍 뚫린 렌즈로 본 역사
3관(K3)에서 열리는 보이드의 작품 주제는 인종차별과 서구 중심의 역사관을 비판하는 것이지만, 장파의 작품에 비해서는 덜 직설적이다. 보이드는 이번 전시에서 1958년 호주 정부가 만든 아동용 학습 만화를 소재로 삼은 작품들을 들고 나왔다. 해당 만화는 백인 탐험가가 호주를 개척하며 여러 업적을 세우고 원주민과 사이좋게 지낸 것처럼 역사를 미화한다. 작가는 “호주 침략의 상징으로 여러 만행을 저지른 제임스 쿡 선장과 원주민이 만화에서는 서로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처럼 묘사돼 있다”고 설명했다.


보이드의 그림 전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점이다. 이 점 때문에 배경의 그림 대부분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보이드는 “점은 세상을 보는 ‘렌즈’를 상징한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각자의 렌즈(점) 구멍을 통해서만 세상을 본다는 뜻이다. 이렇게 보는 세상은 조각나고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이를 통해 관객은 우리가 배우고 익힌 서구 중심의 역사가 절대적인 진실이 아님을 시각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두 전시 모두 내년 2월 15일까지 열린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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