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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나비 "올 한해 음악에 헌신…덕분에 11년 버텼으니까요" [김수영의 크레딧&]

입력 2025-12-17 06:19   수정 2025-12-17 09:01



두툼한 종이책을 손끝으로 한 장 한 장 넘기다가 마지막으로 덮는 책 표지의 무게가 새삼 묵직하게 느껴지는 시대다. 짧고 빠른 것의 연속인 세상에서 완독이 주는 보람과 여운은 가슴 한편 상당히 깊은 곳에 자리 잡는다. 하나의 흐름을 따라 긴 숨을 몰아쉴 일이 적어지면서 희소해진 감정이다.

음악은 더욱 빠르게 나타났다가 소비된다. 온 감정을 집중해서 가사와 멜로디에 신경을 써보는 일이 귀해졌다. 그 가운데 꾸준히 '귀한 감정'을 살려내고 있는 팀이 있다. 10년 넘도록 뚝심 있게 자신들만의 음악 세계를 펼치고 있는 그룹사운드 잔나비(최정훈, 김도형)의 이야기다.

잔나비는 올해 정규 4집을 발매하며 1년 간 20여곡을 쏟아냈다.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가 오랜 시간 음원차트에서 롱런하며 예술성은 물론이고 대중성까지 얻었지만, 이들의 행보에서 느슨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계속 작업물을 내며 활동해온 데 이어 올해는 무려 정규앨범으로 재차 음악성을 증명해냈다.

최근 경기 성남시 분당구 작업실에서 만난 최정훈은 "어느 때보다 알차게 음악을 많이 만들었다. 한해가 끝나는 게, 숫자가 넘어가는 게 아쉬울 정도다. 몸이 조금 힘들어도 '앞으로 이렇게 더 재미있게 할 맛이 나겠구나' 생각이 드는 한해"라고 말했다. 김도형 역시 "매년 의미 있긴 했는데, 특히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풍족했다. 작업물도 많았고 팬분들과 함께한 시간도 많았다"며 흡족해했다.

앞서 잔나비는 이번 정규앨범 발매를 '번갯불콩대작전'이라고 정의했었다. 정규 프로젝트를 하나의 큰 계획으로 삼아 매일 직장인이 출근하듯이 작업실에 갔고, 곡 쓰는 걸 일로써 생각하며 쉴 새 없이 결과물을 완성했다. 이른바 '잔나비 요새'로 불리는 작업실에 장기간 박혀 원하던 곡이 나올 때까지 씨름하던 과거 방식과는 달랐다. 번갯불이 떨어지는 듯한 찰나의 영감들을 모아 순간순간 풀어냈다.

최정훈은 "그전까지는 만족할 결과가 나올 때까지 작업실에 숨어서 곡을 만들었는데 이번에는 계획을 지키는 데 중점을 뒀다. 우리 나름대로는 작전이었다. 다 이루고 나니까 이렇게 음악 하는 것도 재미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미소 지었다. 김도형은 "예전에는 작업을 시작하려면 '또 죽겠구나'라는 마음이 있었는데, 이렇게 하니 쉴 때는 정말 쉬는 맛이 나더라"며 웃었다.

다만 두 사람은 "작업실에서 썩어 문드러지는 게 더 재미있긴 하다"면서 "새로운 맛도 봤으니 이제 원래 하던 맛에서 작업 스위치를 껐다 켰다 할 수 있는 유연성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2022년부터 쌓은 데모곡을 꺼내 보며 발전시키고, 신곡도 쓰면서 1년을 오롯이 음악에만 투자한 잔나비였다. 앨범에는 '사운드 오브 뮤직'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이를 파트1·2로 나누어 각각 4월과 10월에 발매했다. 파트1의 타이틀곡은 에스파 카리나와 협업한 '사랑의 이름으로', 파트2의 타이틀곡은 '첫사랑은 안녕히-'였다. 중간에 '사옵뮤 외전: 여름방학 에디션'으로 2곡을 깜짝 공개하기도 했다.

최정훈은 "음악에 헌신하는 한 해를 보내자는 생각에 처음에는 앨범명을 '뮤직'이라고 했다. 그런데 음악에서 소리를 뜻하는 '사운드'를 붙였을 때 조금 더 의미가 좁혀지는 것 같더라. 고작 그 소리 하나 때문에 우리의 11년이 흘러갈 수 있었고, 버틸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한 나름의 헌사를 바치고 싶었다. 실제로 무슨 의식이나 제사를 지내는 것처럼 음악에 모든 걸 바치는 한 해를 보냈다"고 밝혔다.

파트1의 키워드는 우주, 파트2는 땅으로 설정했는데 최정훈은 "굳이 의미를 담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저절로 담길 거라는 자신이 있었다"고 했다. 그는 "우주와 땅을 생각하면서 곡을 추리고, 만들고, 가사를 쓰다 보면 그동안 골몰해 있던 꿈과 현실에 대한 이야기와 맞게 전개될 거란 자신이 있었다. 이전까지는 꿈, 이상, 환상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는데 이번에는 땅에 딱 닿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파트1에서 우주를 한 번 더 보여주고 파트2에서 땅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은 첫 트랙부터 마지막까지 이어서 들을 때 더욱 빛을 발한다. 사운드적으로나 서사적으로나 트랙 간 연결성이 상당히 좋다. 잔나비 음악의 핵심 정서인 향수를 기반으로 파트1에서는 꿈과 이상에 대한 주제가 현실과 섬세하게 교차하고, 파트2에서는 본격적으로 현실과 맞닿은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 다채로운 사운드로 잔나비의 들끓는 도전정신도 엿볼 수 있다. 김도형의 기타를 비롯해 신시사이저, 베이스, 드럼, 비올라, 바이올린, 첼로, 트럼펫, 트롬본, 색소폰, 퍼커션, 호른 등 다양한 소리가 곡의 특성에 맞게 적재적소에 들어가 풍성한 감상을 일으키고, 소리의 질감은 트랙 간 훌륭한 연결고리가 되기도 한다.

최정훈은 "단순히 이음새만 있는 것보다는 다음은 어떤 곡이고 무슨 이야기인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앞뒤 곡의 배치는 물론이고, 앨범 전반적으로 꿰뚫는 이야기나 사운드를 신경 쓴다. 앨범을 마무리할 때쯤 한 번 더 포장한다. 파트1 때는 이런 시간이 좀 많았는데 파트2에서는 부족했기 때문에 약간의 아쉬움은 있다"고 털어놨다.

작법에서는 충만한 감성과 무한한 상상력이 느껴지는데, 이 모든 건 작곡과 함께 가사도 쓰는 최정훈의 경험에 기인한다. 이번 앨범 수록곡인 '잭 케루악'은 그가 좋아하는 소설가고, 친구 딸의 돌잔치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마더'를, 처음 간 뉴욕 여행에서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보면서 '오 뉴욕시티'를 썼다. '옥상에서 혼자 노을을 봤음'에는 그의 삶이 그 자체로 빼곡하게 들어가 있다. '가짜'가 없는 '진짜'의 노랫말들 덕분에 모든 트랙이 감정적으로 밀도가 높다.



잔나비 음악의 줄기는 크게 과거의 나, 엉뚱한 상상력 둘로 흐른다. 최정훈은 "가사를 쓸 때는 과거의 내가 자극을 준다. 엉뚱한 상상력은 쓸 때는 자극적인데, 그 중간을 잡기가 정말 힘들다. 그 카테고리 안에서 쓰다가 관둔 이야기들도 아주 많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나에 대한 이야기는 스스럼없이 언제든 나온다. 다만 일상에서 경험하는 게 직업적인 원천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거기서 오는 힘듦은 있다. 이 또한 재미있다. 싱어송라이터가 아니면 살기 힘든 삶이니까"라고 긍정적으로 답했다.

영감을 위해 일상을 굳이 환기하려고 하진 않는다면서 김도형과 맛있는 걸 먹으러 가는 게 즐거움이라고 했다. 두 사람은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는 게 큰 환기감을 준다면서 "추억이 있는 행위다. 스스로 1년에 한 번씩 주는 상"이라며 웃었다.

잔나비의 음악은 하나의 앨범 안에서만 흐름을 갖지 않는다. 앨범 간에도 연결점이 있어 마치 하나의 큰 대서사시처럼 읽힌다. 팬들이 여러 해석을 내놓으며 열광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게 무지개 서사다. '무지개가 떨어진 곳을 알아. 내일은 꼭 함께 가자는 그녀. 내 손을 감싸 쥐는 용감한 여전사여'(She, 2017)라고 말했던 남성 서사는, '나는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지. 거긴 그 무엇도 없다는 것을. 그래 넌 두 눈으로 봐야만 믿잖아. 기꺼이 함께 가주지'(외딴섬 로맨틱, 2021)라는 여성 서사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번 앨범의 '모든 소년 소녀들2 : 무지개'에서 '저어기 어딘가 그 너머로 너머로 너머로 우리는 늘 첨벙첨벙 뛰놀았는데. 오늘을 살아가려 비로소 난 내일을 죽였네. 호주머니 속 들은 몇 개의 약속을 까먹으며', '무지개! 무지개! 무지개! 물들던 그 바짓단을 접어보겠나? 땀에 절어본 우린 시원한 바람도 안다네. 그리고 꿈의 용도. 그저 꾸기 위함이었다네'라고 8년간 이어진 서사의 방점을 찍었다.

최정훈은 "의도하지 않아도 세계관이라는 게 그냥 묻어나는 것 같다. 어떤 곡이든 내 이야기를 쓰려는 스타일이라서 나의 세계가 드러난다. 이번 앨범 작업을 하면서 많이 느꼈다. 스스로도 재미있고 뿌듯하다"고 말했다.

이번 앨범에서 가장 좋아하는 곡으로는 '모든 소년 소녀들1 : 버드맨'을 꼽았다. 보스턴의 한 조용한 카페에서 곡을 썼다면서 "지금도 그때의 감정이 생생하다. 과거 '꿈과 책과 힘과 벽'이라는 곡을 쓸 때랑 비슷했다. 근 몇 년간의 내게 트로피 같은 가사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꿈과 책과 힘과 벽'을 쓰면서 지하 작업실에 있던 나에게 주는 상 같은 가사라 생각했는데, '버드맨'도 그랬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김도형은 '모든 소년 소녀들3 : 글로리'를 택하며 "우리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마냥 멋있는 건 안 어울린다. 단순하고 직진성이 있는데 한편에는 엉뚱한 매력도 있는 영웅을 떠올렸다. 녹음하면서 되게 뭉클했다"고 말했다.

잔나비 하면 많은 이들이 레트로를 떠올리는데, 이들은 "클래식"이라는 표현을 썼다. 실제로 클래식한 작법과 낭만 위에서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사운드를 지속해서 발전시켜온 잔나비였다.

최정훈은 "낭만적인 음악을 하는, 낭만을 아끼는 친구들이라고 생각해주시면 좋겠다. 흔히들 '낭만적이야'라고 이야기하는데 우리한테 낭만이라는 건 삶의 애티튜드라고 할 정도로 큰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김도형은 "클래식하고 고전적인 것, 향수를 좋아한다"고 덧붙였다.



올해의 큰 사건으로 KSPO돔(올림픽체조경기장) 공연도 빼놓을 수 없다. 잔나비는 인디밴드 최초로 국내 대형 공연장 중 하나인 KSPO돔에 입성해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서현역에서 버스킹하던 소박했던 첫 걸음은 11년의 세월을 지나 1만명이 넘는 관객들과 함께 인디 역사에 커다란 하나의 발자국을 남겼다. 공연 당시 초창기 버스킹 콘셉트로 데뷔곡을 불러 감동을 안기기도 했다.

콘서트는 "자아를 바꿔 끼우는 정도의 환기"라고 했다. 최정훈은 "공연하고 내려왔을 때의 우리를 동경하는 마음으로 회상할 때도 있다. 그만큼 기분이 황홀하다"고 고백했다. 김도형도 "작업할 때는 둘이 방에 갇혀서 한 곳만 뚫어져라 보고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 무대를 뛰어다니는 거지 않나. 우리를 향해 환호해주시는 게 감사하다. 음악을 조금 더 맛있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잔나비는 꼭 공연을 봐야 한다'고 할 정도로 이들 콘서트는 완성도 높은 음악과 열띤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서정적인 무대부터 열정을 휘두른 강렬한 무대까지 쉼 없이 달린다. 최정훈은 "공연이 끝나면 수분이 다 빠져나가서 몸에 쥐가 날 정도다. 체조경기장 공연 후에는 마이크를 잡은 손이 안 펴지기도 했다"고 전했다.

최근에는 대만에서도 콘서트를 진행했다. 김도형은 "해외에서 우리 음악을 들어주고 기다리는 분들이 많다는 점에 놀라고 기뻤다. 잊지 못할 추억"이라고 털어놨다. 최정훈은 "생각해보면 별것도 없는 애들이고, 지금까지 음악을 해 온 것만으로도 대견한데 많은 분이 사랑해 주신다는 게 감사하다. 정말 운이 좋았다"고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연말, 연초에도 콘서트 '합창의 밤'으로 팬들과 만난다. 최정훈은 "따뜻한 연말을 만들어드리고 싶어서 그에 맞춰 세트리스트를 구성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올 한해의 마지막과 내년의 시작에 의미 있는 감정을 전달해드릴 수 있을지 생각하며 준비 중"이라면서 "이번엔 대표곡 비중을 조금 더 올렸다"고 귀띔했다.

"요즘은 하루하루에 대한 생각을 가장 많이 합니다. 어떻게 하면 잘 지낼 수 있는지, 주어진 일과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지 등이요. 그렇다고 계속 파트2처럼 현실적인 언어로 얘기하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듭니다. 올해 새로운 꿈을 많이 찾기도 했거든요. 앞으로 더 재밌는 음악들이 펼쳐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습니다."


K컬처의 화려함 뒤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땀방울이 있습니다. 작은 글씨로 알알이 박힌 크레딧 속 이름들.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스포트라이트 밖의 이야기들. '크레딧&'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을 하는 크레딧 너머의 세상을 연결(&)해 봅니다.

김수영 한경닷컴 기자 swimming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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