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의 몸은 아이를 잉태하고 낳는 과정에서 참혹하게 터지고 부서진다. 육아 역시 전쟁에 비견될 정도로 힘들고 어렵다. 이 과정에서 평생 쌓아온 경력이 흔들리거나 단절되기도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을 주기도 한다.
서울 원서동 아라리오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이은실(42)의 개인전 ‘파고’에는 출산의 이 같은 양가적인 성격을 다룬 작품들이 나와 있다. 작가는 14년 전 첫 아이와 9년 전 둘째를 낳으며 경험한 일과 감정, 생각을 캔버스에 담아냈다.


1층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로 7.2m에 달하는 대작 ‘에피듀럴 모먼트(Epidural Moment)’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깊은 산속 안개 사이로 승천하는 용을 그린 전통 동양화처럼 보이는 이 그림은, 사실 출산 도중 마취제를 맞았을 때의 경험을 표현한 것이다. 제목의 ‘에피듀럴’부터가 산모의 통증을 없애기 위한 마취(무통주사)라는 뜻이다. 마취제가 몸에 들어와 일순간 고통이 사라지고 정신이 몽롱해지는 그 초현실적 순간. 작가는 이를 뱀이나 용이 몸을 휘감는 형상으로 표현했다.
‘고군분투’는 출산할 때 힘을 주다 실핏줄이 터져버린 붉은 눈을 클로즈업해 그린 작품이다. ‘절개’와 ‘흔적’은 각각 출산을 위한 피부 절개 부위와 튼살을 그린 것이다. ‘넘치는 마음과 그렇지 못한 태도’는 젖몸살로 인해 붉게 부어오른 가슴을 소재로 했다. 출산으로 인한 몸의 변화를 자연 현상에 빗댄 작품들도 나왔다. 몸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는 협곡을 흐르는 붉은 용암(‘멈추지 않는 협곡’)이 되고, 진통이 시작되기 전의 전조 증상은 바다 위 거대한 소용돌이(‘전운’)가 됐다.

2006년 서울대 동양화과를 졸업한 작가는 2008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젊은 작가 단체전 ‘젊은 모색 2008’, 2014년 리움미술관의 유망 작가 단체전 ‘아트스펙트럼 2014’에 참가하는 등 일찌감치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임신과 출산은 그의 작업과 생활을 뒤흔들었다. 작가는 “그동안 몸과 마음의 변화를 돌아볼 시간이 없었는데, 아이들이 어느정도 크고 나니 출산이라는 사건을 찬찬히 되짚어 볼 수 있었다”며 “이번 전시는 관련 작품을 처음으로 소개하는 자리”라고 말했다.
작가는 출산의 고통을 숨기거나 미화하지 않지만, 이를 마냥 부정적으로 표현하지도 않는다. 갤러리 관계자는 “고통과 환희, 절망과 해방 등 서로 교차하는 입체적인 감정을 담은 작품들”이라고 설명했다. 전시 제목인 ‘파고’는 출산이 남긴 파동이 파괴에서 그치지 않고 회복과 순환으로 이어지는 생명의 섭리임을 뜻한다.

1층 입구와 지하 1층에서는 신작 10점을, 3~4층에서는 작가의 지난 17년 화업을 돌아볼 수 있는 구작을 만날 수 있다. 전시는 내년 1월 31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