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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 한도 초과! 서촌에서 즐기는 클래식

입력 2026-01-02 15:28   수정 2026-01-02 15:29

레트로, 빈티지, 아날로그 감성...... MZ 세대에겐 유행의 키워드지만 ‘옛날 사람’에 가까운 나에게 이 단어들은 너무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종종 느끼는 어지러움을 잠시나마 완화하는 ‘멀미약’ 같은 효과를 주기도 한다.

지금보다 덜 빠르고, 덜 선명하고, 덜 똑똑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깊이 느끼고 더 상상할 수 있었던 시절. 시간이 걸리는 정성과 노력이 서로에게 필요하고 중요했던 ‘그 시절’은 나에겐 늘 그리운 한 조각이다.

새해도 밝았는데 무슨 옛날이야기를 이렇게 늘어놓나 싶다면, 오늘은 아예 이 분위기를 몰아 ‘오래된 동네’ 서촌으로 가볼까?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내려 통인시장 쪽으로 나가보자. 건물들은 낮고 길은 좁지만 멀리 보이는 북악산과 인왕산은 병풍처럼 기품 있고, 작고 핫한 가게들이 오래된 동네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친구와 팔짱을 끼고 재잘대며 천천히 걷고 구경하기에 참 좋다.



유명한 삼계탕집을 지나 조금 더 걸어 골목 안으로 들어서면 시선이 멈추는 건물이 하나 있다. 하얀 석재 외관에 나뭇결이 살아있는 아치형의 문. ‘어머, 예쁘다’라는 감탄이 절로 나서 스마트폰 카메라를 켜게 되는, 클래식 공연 기획사 크레디아의 서촌 사옥이다. 서울의 대표적인 옛날 동네를 일순간 유럽의 골목으로 만드는 이 건물 지하 1층에는 ‘크레디아 클래식클럽 STUDIO’라는 작은 공연장이 있다.

내가 이곳을 처음 찾은 것은 지난해 8월, 박종해 피아니스트의 ‘슈베르트의 밤- 두 번째 시간: 슈베르트 포핸즈’ 공연을 보기 위해서였다. 건물 지하로 내려가니 뵈젠도르퍼 피아노가 가운데 놓여있고 피아노를 둥글게 둘러싼 소수의 객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무대와 객석이 따로 구분되어 있지 않고 연주자와 객석의 거리가 아주 가까운 데다 의자에 앉으면 연주자의 눈높이와 거의 비슷해 유독 더 가깝게 느껴졌다.





사실 이곳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한쪽 면에 마련된 바(Bar)다. CREDIA CLASSIC CLUB이라고 쓰인 반짝이는 네온사인과 와인글라스, 빈티지 같은 LP판이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는데 실제로 바텐더가 공연에 어울리는 음료까지 만들어준다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날은 박종해 피아니스트와 박진형 피아니스트가 ‘인생의 폭풍’, ‘특징적인 행진곡 1번’, ‘오리지널 테마에 의한 변주곡’ 등 슈베르트의 포핸즈 작품들을 선보이고 작품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슈베르트의 음악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응원했던 친구들이 그를 위해 모임을 만들고 그의 작품을 연주했던 ‘슈베르티아데’를 표방하는 기획 공연답게 오롯이 슈베르트의 음악을 즐길 수 있었는데, 어두운 조명 속에서 연주자를 둘러싸고 옹기종기 모여 앉은 덕분인지 ‘그 옛날 슈베르티아데가 이런 느낌이었을까’ 싶었다.

이 날의 좋은 기억을 가지고 지난 12월 열린 ‘슈베르트의 밤- 세 번째 시간: 겨울나그네’ 공연에도 다녀왔다. 작곡가 손일훈이 편곡한 ‘겨울나그네’의 일부를 문태국 첼리스트의 독주로 듣는 시간도, 첼로와 피아노 듀오로 듣는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도 계절에 어울리는 낭만과 멋이 있었다.



짧은 겨울 해가 진 주말 저녁, 서촌이라는 동네에서 슈베르트를 듣는 동안 그런 생각이 들었다. 피아니스트의 손끝에서 살아나는 세레나데, 첼리스트의 활 끝에서 피어오르는 노래... 수백 년의 시간을 지나면서도 그 생명력을 잃지 않는 건 물론 그날의 분위기와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따라 늘 새로운 감동과 즐거움을 주는 클래식 음악은 어쩌면 ‘옛날 것’ 중에 가장 새로운 것이 아닐까?

느리고 깊은 호흡이 필요하지만 마음껏 상상할 수 있고, 연주자의 정성과 노력이 듣는 이에게 전해져 에너지가 되어 오래도록 남는 클래식 음악은 레트로나 빈티지, 아날로그 감성이라는 단어만으론 다 설명할 수 없는 정말 매력적인 ‘옛날 것’이 아닐까 하는. (이런 클래식을 사랑하는 나는 어쩔 수 없는 옛날 사람인가 보다)

그렇게 슈베르트의 음악으로 마음을 따뜻하게 덥히고 나서는 동행한 친구와 함께 공연장 가까이에 있는 이북식 만둣국 집을 찾아 심심할 만큼 담백하고 따끈한 만둣국으로 배를 채웠다. 공연장의 분위기와 음악도, 겨울의 서촌 거리와 저녁 메뉴도, 모든 것에 온기와 낭만이 가득한 날이었다.



다시 공연장 이야기로 돌아와서 크레디아클래식클럽 STUDIO를 조금 더 소개하자면 사실 이곳은 클래식 공연 이외에도 다양한 행사가 열리는 ‘재미난 곳’이다.

크레디아클래식클럽의 기획 렉처 시리즈인 ‘서촌풍류’를 통해 지난해 2개 시즌에 걸쳐 ‘유정우의 오페라 VIBE’, ‘간송미술관- 우리 옛 미술 이야기’ 등 문화예술 강좌가 열렸고, 3월에는 ‘서촌 마치(March)’라는 봄 축제를 통해 재즈와 실내악 공연, 플리마켓, 토크콘서트 등 다채로운 행사가 이어졌다. 또 위스키 브랜드와 협업한 위스키 클래스, ‘런플루언서’와 협업해 서촌을 달리는 러닝 클래스까지 MZ 세대의 취향을 저격할 만한 이벤트도 열렸으니 올해는 또 어떤 재미난 일들이 벌어질지(?) 궁금해진다.

앞서 이야기한 박종해 피아니스트의 ‘슈베르트의 밤’은 2025년에 시작해 무려 10년간 이어질 기획 공연이라고 한다. 언제든 한 번쯤 발걸음 해 서촌의 계절도 즐기고 ‘슈베르티아데’를 경험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올해도 많은 것들이 빠르게 변화하고 새롭게 생겨날 것이다.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고 새로운 것들을 수용하는 마음도 중요하지만 난 우리에게 조금은 느리고, 깊고, 정성을 기울이는 일에 대한 본능적인 갈망이 있다고 믿는다. 그 본능적인 갈망을 좋은 클래식 음악이 뭉근하게 채워주는 2026년이 되기를 소망해본다.

권혜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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