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년간 인공지능(AI)과 반도체 등 첨단 산업에 150조 원을 투입하는 국민성장펀드가 공식 출범했다. 전 세계가 생존을 건 산업·기술 패권전쟁을 펼치고 있는 만큼 국가 차원에 막대한 재원을 투입해 첨단 전략 산업을 육성하겠다는 구상이다.
정부는 기업들이 혁신과 성장을 맘껏 이뤄낼 수 있도록 금융을 통해 마중물 역할을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정부의 구상과 달리 우려도 상당하다. 천문학적인 자금을 적재적소에 투입할 ‘선구안’이 절실한 시점이어서다. 일각에서는 국민성장펀드의 절반이 기업들의 대출 통로를 확대해주는 초저금리에 집중돼 있는 만큼 자칫 대출 중심 정책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2026년 30조 원 투입
금융위원회는 지난 12월 ‘국민성장펀드 출범식 및 제1차 전략위원회’를 열고 향후 투자 구조와 의사결정 체계를 공개했다. 국민성장펀드는 정부보증채권 75조 원과 민간자금 75조 원을 합쳐 150조 원 규모로 조성된다. 이 자금은 AI, 반도체, 바이오, 로봇 등 첨단 전략 산업과 관련 생태계를 지원하는 데 쓰인다. 향후 5년간 AI(30조 원), 반도체(20조9000억 원), 모빌리티(15조4000억 원), 바이오·백신(11조6000억 원), 2차전지(7조9000억 원) 등에 민관 자금을 배분하겠다는 구상이다.
전체 자금의 40% 이상은 지역에 할당하기로 했다. 이억원 금융위원장은 “세계가 생존을 건 산업·기술 패권전쟁을 펼치고 있는 가운데 국가 역량을 총동원해야 하는 시기”라며 “향후 20년 성장 엔진을 마련하는 국민성장펀드의 여정을 금융권, 산업계, 정부가 함께 만들어 가겠다”고 강조했다.

특히 국민성장펀드가 본격 가동되는 첫해인 2026년에는 총 ‘30조 원+α’ 규모의 자금이 투입된다. 이 중 6000억 원은 ‘국민참여형 펀드’로 조성해 일반 국민도 성장의 과실을 함께 향유하도록 하고, 8000억 원은 ‘초장기기술투자펀드’에 배정해 기술 기업에 10년 이상 투자하기로 했다. 금융위는 30조 원보다 수요가 많더라도 적극 승인해 초기 지원 효과를 극대화하겠다는 방침이다. 산업별로는 AI 6조 원, 반도체 4조2000억 원, 미래차·모빌리티 3조1000억 원 등이다. 지원 방식별로는 직접투자 3조 원, 간접투자 7조 원, 인프라투융자 10조 원, 초저리대출 10조 원 등이다.
정부가 기업과 지방자치단체 등의 투자 수요를 조사한 결과 투자 대상은 총 100여 건, 규모는 153조 원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투자를 적극 승인해 초기 지원 효과를 극대화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국민성장펀드 어떻게 운용되나
국민이 참여하는 국민 참여형 펀드는 6000억 원 규모로 2026년 1분기 조성한다는 방침이다. 일각에선 예전 정책 펀드의 실패 사례 등으로 투자 자금을 모으기가 쉽지 않다는 전망도 나온다. 정부 관계자는 “펀드 규모의 최대 20%를 재정으로 출연해 손실을 우선 충당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며 “국민의 투자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구 부총리는 “국민성장펀드가 산업계의 도전정신을 금융권의 모험자본이 적극적으로 뒷받침해 첨단 전략 산업 발전의 ‘기폭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성장펀드를 투명하고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해 의사결정 단계마다 금융·산업계 전문가가 참여한다. 민관 공동위원장에 이 위원장과 함께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의 이름을 올린 이유다. 박 회장은 “150조 원 국민성장펀드는 AI, 로봇, 반도체, 바이오, 인프라 등 기업 성장의 초석이자 창업을 춤추게 할 마중물”이라고 평가했다.
서 회장 역시 “국민성장펀드는 성장 속도를 높이는 것을 넘어 성장 구조 자체를 바꾸는 국가 프로젝트”라며 “민간에서 축적한 경험, 데이터, 글로벌 네트워크를 국가전략으로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수행하면서 산업 생태계 전반의 경쟁력 강화와 지역경제 성장, 일자리 창출 등이 실질적으로 나타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 밖에 이병헌 지방시대위원회 ‘5극3특’ 특위 위원장, 김효이 이너시아 대표, 이상민 뉴빌리티 대표 등 지역·청년·산업계 인사들도 위원회에 합류했다.
국민참여형 펀드도 조성
업계에서는 전례 없는 규모로 꾸려진 국민성장펀드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유망 투자처를 발굴하는 선구안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이 위원장 역시 “150조 원 국민성장펀드와 530조 원 규모의 생산적 금융 등 압도적 숫자에 걸맞은 실질적인 성과를 내야 한다”고 했다.
정부는 이를 위해 우선 150조 원 가운데 15조 원을 시장성 차입, 저리 대출이 어려운 중소·중견기업이나 대규모 공장 증설을 위한 특수목적법인의 증자에 참여하는 직접투자 형태로 쓰기로 했다. 기업이 투자자금 유치에 나설 경우 민간자금과 기금이 지분 투자자로 공동 참여한다. 산은이 주도하는 첨단전략산업기금이 직접 지분 투자에 나서 기술 기업을 인수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첨단전략산업기금과 은행, 연기금, 퇴직연금 등 민간자금을 합쳐 대규모 펀드도 조성할 예정이다. 일반 국민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국민참여형 펀드를 조성해 과실을 함께 나누도록 하는 게 목표다. 첨단 산업 유망 기술 기업 등에 10년 이상 장기간 투자하도록 하는 ‘초장기 기술투자펀드’도 신설한다.
전력망, 발전, 용수시설 등 인프라 구축사업(50조 원)도 국민성장펀드의 주요 투자처다. 그중 경기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집단에너지 발전사업, 전남 해남 국가 AI 컴퓨팅센터, 반도체 폐수 재이용 사업 등이 국민성장펀드 1호 투자 후보로 올라 있다.
정부는 또한 대규모 설비투자, 연구개발(R&D) 등에 쓰일 자금을 위해 연 2~3%대 국고채 수준의 초저금리 대출(50조 원)에 나선다.
초저리 대출에 줄서는 기업들
하지만 국민성장펀드의 효율적인 배분에 대한 우려도 상당하다. 정부가 150조 원 규모의 국민성장펀드를 출범시키면서 첨단 전략 산업에 총 50조 원 규모의 초저금리 대출을 내주기로 하자 기업들의 대출 신청이 줄을 잇고 있어서다. 시중은행은 엄두도 못 낼 국고채 수준의 파격 금리를 제공하겠다고 선언해서다.
하지만 산업은행 주도의 첨단전략산업기금(75조 원)의 70%에 달하는 막대한 자금이 기업대출에 쏠리면서 혁신 기업 육성이라는 당초 취지와 달리 단순히 돈을 빌려주는 정책으로 전락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2026년부터 정부 지침에 따라 주택담보대출을 조이고 ‘생산적 금융’을 본격화해야 하는 시중은행들은 “2026년부터 기업대출 내줄 곳을 찾기도 어렵게 됐다”며 난감해하고 있다.
금융당국에 따르면 연 2~3% 초저금리로 총 50조 원의 대출을 내주는 국민성장펀드를 활용하기 위해 기업들의 신청이 쇄도하고 있다. 금융당국 고위 관계자는 “금리 매력 덕분에 당초 예상과 달리 국내 주요 기업 대다수가 초저리 대출을 받기 위해 신청한 상태”라고 밝혔다. 금융위원회는 정부 보증채권으로 조달하는 75조 원의 첨단전략산업기금 중 50조 원을 초저리 대출에 활용할 방침이다. 대규모 설비투자, R&D 등에 쓰일 자금을 연 2~3%대 국고채 금리 수준으로 제공하는 게 목표다.
기업대출 늘려야 하는 시중은행 긴장
이번 초저금리 대출로 인해 발생하는 역마진은 산은이 쌓아 둔 이익잉여금으로 감당하게 한다는 것이 정부 구상이다. 자금조달에 나서는 기업 입장에선 정부가 담보하는 초저리 대출을 마다할 이유가 없는 셈이다. 평소 대출을 통한 자금조달을 기피해 온 대기업들도 정부 핵심 정책에 호응하기 위해 앞다퉈 대출 신청에 나서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기업대출을 새 먹거리로 삼아야 하는 시중은행은 골머리를 앓고 있다. 우량 기업대출 수요가 국민성장펀드로 몰릴 것이 불 보듯 뻔해서다. 한 시중은행 부행장은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정부가 나서 기업들의 자금 숨통을 틔워주려는 취지는 이해한다”면서도 “생산적 금융 확대 기조에 따라 주택담보대출을 줄이고 기업대출을 늘려야 하는 상황인데 대출받을 기업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정부보증채로 조달하는 국민성장펀드의 초저리 대출은 도래하는 만기에 맞춰 반드시 상환이 이뤄져야 하기 때문에 고위험 대출에 적극적으로 뛰어들 수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결국 은행 입장에선 생산적 금융 할당 목표를 채우기 위해 신용도 낮은 기업 위주로 기업대출을 내주고, 리스크 관리에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란 우려가 크다.
일각에선 국민성장펀드의 대출 중심 기금 운용 전략이 리스크를 감수한 혁신 투자와 거리가 멀다는 지적도 나온다. 당국의 운용 계획에 따르면 초저금리 대출(50조 원)이 간접투자(35조 원) 규모를 훌쩍 넘어선다.
한국판 국부펀드 나온다
정부는 기획재정부를 중심으로 싱가포르 테마섹, 호주 퓨처펀드를 본뜬 국부펀드를 운용키로 했다. 국민성장펀드와 별개로 국부를 창출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판단해서다. 이재명 대통령 역시 “과거의 (정책펀드) 자금은 사업을 지원하고 보충하는 수준이었다면, 개별 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대규모 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국부를 창출하는 국가 단위의 펀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국형 국부펀드는 1300조 원이 넘는 국유재산(국부)을 체계적으로 축적·증식해 미래 세대로 이전할 목적으로 2026년 상반기 설립한다. 정부와 한국은행이 맡긴 외환보유액으로 해외에 투자하는 한국투자공사(KIC)와 별도로 국내 시장에 주로 투자할 계획이다.

테마섹은 싱가포르의 공기업과 공공기관에서 나온 수익을 전 세계 기업, 부동산 등에 투자하는 국부펀드다. 설립 50여 년 만에 자산을 1900배 불려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국부펀드로 평가받는다. 호주 퓨처펀드는 자원 호황 때 생긴 재정 여유를 미래 연금부채 충당에 활용하기 위해 2006년 설립한 펀드다. 두 개의 국부펀드 모두 정부가 소유하지만 운용에 일절 개입하지 않고 독립성을 강화한 게 특징이다.
기획재정부가 ‘한국형 국부펀드’를 설립하려는 건 글로벌 패권 경쟁이 최첨단 기술 선점을 위한 국가 대항전 형태로 벌어져 정부의 적극적 역할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반영된 결과로 풀이된다. 수백조 원이 투입되는 국내 인프라 사업과 해외 대형 수주 경쟁에 정부가 자금을 지원하는 대신 수익을 국민과 공유한다는 이재명 대통령의 ‘K(한국형)-엔비디아’ 구상을 구체화하기 위한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싱가포르 테마섹은 싱가포르텔레콤, 싱가포르항공, 싱가포르항만공사(PSA) 등 공기업 29곳을 거느린 싱가포르의 정부투자지주회사다. 1974년 출범 당시 3억4500만 싱가포르달러에 불과하던 테마섹의 자산은 2023년 말 기준 6540억 싱가포르달러(약 674조 원)로 50년 동안 1900배 증가했다. 비자, 마스터카드, 블랙록, 텐센트 등 유수의 글로벌 기업에 투자해 이룬 성과다. 한국 기업 중에선 셀트리온에 투자했다.
한국형 국부펀드의 재원으로는 상속세 물납 제도를 통해 정부가 가진 비상장 주식이 우선 거론된다. 2025년 8월 기준 정부는 350개 종목, 6조8000억 원어치 물납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구 부총리는 “주식을 단순히 매각하는 데 중점을 두지 않고 필요하면 더 사서 경영권을 붙여 매각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다만 150조 원 규모로 출범한 국민성장펀드 등 다양한 정책 펀드가 운용되는 상황에서 한국형 국부펀드가 투자 중복과 비효율을 낳을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중소기업모태조합출자(중소벤처기업부), 미래환경산업투자펀드(기후에너지환경부), 뉴스페이스투자지원(우주항공청) 등은 적절한 투자처를 찾지 못해 출자액이 2조 원이나 남아 있지만, 정부는 2026년에도 1조 원 이상의 예산을 추가 배정했다.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한 한국형 투자펀드가 국내 주식·채권과 대체투자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입하면 국민연금과 함께 민간 시장을 구축하는 ‘두 마리의 연못 속 고래’가 될 가능성도 있다.
박재원 한국경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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