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끔 관객들 표정이 보이는데, 좋을 때도 있지만 무서울 때도 너무 많아요. 반한 표정이 아닙니다. 제가 해석할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관객들과 눈이 마주치면 순간적으로 몰입이 깨져서 다시 부여잡고 가야 해요."
2011년 영화 '파수꾼'으로 데뷔한 뒤 '동주', '변산', '사바하',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밀수', '전, 란', '하얼빈', '얼굴' 등 여러 작품에서 연기력을 입증했던 박정민은 자신을 "초심자"라고 표현하며 이같이 말했다.
박정민은 8년 만에 공연 무대로 복귀해 '라이프 오브 파이'의 주연인 파이 역으로 작품을 이끌고 있다. 그간 코미디, 오컬트, 브로맨스, 역사물 등 장르를 불문하고 폭넓은 스펙트럼을 자랑한 그였지만, 유독 라이브 무대와는 인연이 쉽게 닿지 않았었다. 마지막 공연은 2017년까지 공연했던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이었다.
박정민은 "(공연 출연) 제의가 간간이 있었지만 겁이 났다"면서 "공연하는 걸 너무 싫어하니까 소속사 대표님이 '라이프 오브 파이'도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이건 꼭 했으면 좋겠나 보더라. 유튜브 영상을 보내줘서 봤는데 기가 막히더라. 이 정도의 연출이라면 근사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이어 "고민 중인데 황정민 형님이 '그럼 하지 마. 내가 할게'라고 하더라. 그 말을 들으니 이게 좋은 건가 싶더라. 그래서 하겠다고 말했고 오디션을 봤다"고 덧붙였다. 이후 공연을 본 황정민은 "이보다 잘할 수는 없으니 편하게 하라"며 용기를 줬다고 한다.
라이브 무대는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다. 여러 번 컷을 갈 수 있는, 소위 '바로잡을 기회'가 있는 매체 연기와는 또 다른 감상을 느끼고 있다는 박정민이었다. 그는 "누군가 스크린이 없이 내 연기를 직접 본다는 건 굉장히 흥분되고 흥미롭고 신나는 일이면서도, 동시에 서로 굉장히 긴장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관객들은 배우가 실수하면 어떡하나 싶고, 배우도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라이프 오브 파이'를 통해 무대에 대한 배움과 애정이 싹트고 있는 듯했다. 박정민은 "영화는 한 장면을 찍으면 그 부분은 이제 영원히 연기를 안 해도 된다. 앞으로는 할 필요가 없는 장면인 거다. 그런데 공연은 5~6개월 동안 같은 장면을 매일 함께 만드는 작업이다 보니까 연기적인 공부도 많이 되는 것 같고, 상대 배우들하고도 빠르게 돈독해진다. 하나의 장면을 위해 장기간 머리를 싸매고 노력한다는 게 배우로서는 굉장히 해볼 만한 작업"이라고 말했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난파된 배에서 살아남은 소년 파이가 벵골 호랑이와 함께 구명보트를 타고 태평양을 표류하는 227일간의 이야기를 그린다. 맨부커상을 수상한 얀 마텔의 소설 '파이 이야기'가 원작이다. 소설은 영화로도 제작됐는데, 아카데미 감독상·음악상·촬영상·시각효과상 4개 부문을 석권하며 수작으로 평가받았다.
공연으로 재탄생한 '라이프 오브 파이'도 2021년 웨스트 엔드 초연, 2023년 브로드웨이 초연으로 흥행을 거뒀다. 영국의 권위 있는 공연계 시상식인 로런스 올리비에상에서 작품상·남우주연상·남우조연상·조명 디자인상·무대 디자인상까지 5개 부문을 석권했고, 미국 토니상에서도 3관왕을 거머쥐었다.
박정민은 소설·영화와의 차이점에 대해 "주인공의 회고 시점이 다르다는 점에서 오는 감정의 크기가 좀 다른 것 같다"고 말했다. 바다 위에서 일을 겪었을 당시 파이는 10대인데, 소설과 영화는 주인공이 결혼까지 했을 정도로 시간이 흐른 상황에서 과거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반면 공연은 해당 사건을 겪은 직후 병원으로 옮겨진 파이가 이야기하는 식이다.
박정민은 "공연은 갓 살아 돌아온 소년이 얼마 전의 일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거니까 혼란의 정도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소설이 더 정제되어 있고 세밀하고 섬세하게 설명돼 있어서 좋지만, 정서적으로만 보면 공연의 텍스트가 가장 감정적이라고 생각한다. 용기, 희망, 좌절 등이 조금 더 아프게 다가오는 거 같다. 관객분들이 생생한 감정들을 얻어가시지 않을까"라고 밝혔다.
공연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거대한 폭풍우, 수평선과 맞닿은 광활한 밤하늘 등 자연의 경이로움을 무대 디자인, 조명, 영상, 음악, 음향 디자인을 통해 표현했다. 파이와 한배를 타고 표류하는 핵심 배역인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 역은 3명의 퍼펫티어가 각각 머리, 심장, 다리를 맡아 연기한다.
박정민은 "공연 영상을 보고 가장 반한 부분이 동물의 움직임이었다. 그냥 사람 3명이 인형을 움직이는 것 같지만, 관절을 나누고 구성하고 색칠하는 모든 게 계산된 느낌을 받았다. 연습 초반 한 달간은 신체 훈련을 했다. 호랑이랑 호흡을 맞추고 다치지 않도록 안전하게 교류하는 방식을 계속 훈련했다. 그러다 보니 나도 퍼펫티어 중 한 명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굉장히 신기한 경험을 했다"고 고백했다.
다만 여전히 무대가 어렵다면서 "카메라는 감정을 잡으면 얼굴을 잡아주는데 무대는 그렇지 않지 않나. 무대에서만 할 수 있는 연기는 따로 또 있다고 생각했다. 이전까지는 그걸 무시했던 것 같다. 신체적인 표현을 조금 더 하려는데 쉽지 않다. 늘 무섭고, 무용수처럼 몸을 잘 쓰는 배우가 아니라서 가끔 부끄럽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까 이 공연이 너무 힘들다"고 토로했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는 생존 사투를 벌이던 파이가 종교적 신념을 깨고 거북이를 먹는 모습을 꼽았다. 박정민은 "파이라는 인물에 본격적으로 확 들어가는 장면"이라면서 "신념과 생존 사이에서 생존을 선택한 어린 종교인의 혼란부터 이 공연이 감정적으로 몰아치기 시작한다. 누구나 가질 수 있는 혼란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감정적으로 자신을 가장 힘들게 하는 장면은 공연 말미라고 했다. 선박 사고를 조사하는 오카모토가 파이의 이야기를 다 들은 후 분노하며 질책하는 장면이다. 박정민은 "'네 이야기를 가지고 고국으로 돌아가면 사람들은 날 조롱하고 멸시할 거고 비웃을 거니까 똑바로 말하라'고 하는데 그 말을 못 버티겠다. 너무 잔인하게 들린다"고 했다.
이어 "어렵사리 살아온 소년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 감정적으로 가장 힘들다. 그 말을 못 듣겠다. 이상한 마음이 든다"고 재차 강조했다. 다만 작품 내에서의 감정이 일상까지 영향을 미치진 않는다면서 "잘 먹고 잘 잔다"며 웃었다.
작품의 메시지 덕분에 얻은 개인적인 깨달음도 있었다. '라이프 오브 파이'가 간직하고 있는 주된 메시지인 '믿음'에서 오는 깨달음이었다.
박정민은 "삶이라는 것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더라. 믿음, 희망 등의 키워드들이 결국은 삶을 위해서, 구체적으로는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취해야 하는 태도이지 않나"라면서 "'라이프 오브 파이'는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삶을 지탱하는 키워드들은 그때그때 변할 수 있지만, 그런데도 살아가야 한다는 이야기인 것 같다"고 말했다.
파이 역에는 박정민과 함께 뮤지컬배우 박강현이 더블 캐스팅됐다. 박정민은 "제가 하는 파이가 멘탈이 조금 더 약한 것 같다. 감정에 더 치우쳐져 있는 파이 같은 느낌"이라면서 "박강현 파이는 더 소년 같고, 자신에게 있었던 이야기를 당당하게 하는 파이"라고 해석했다.
끝으로 박정민은 '앞으로도 공연 무대에 설 생각이 있냐'는 물음에 "이제는 전처럼 아예 안 한다는 마음은 아니다. '라이프 오브 파이'가 용기를 많이 줬다. 좋은 공연이 있다면 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내년 3월 2일까지 서울 강남구 GS아트센터에서 공연한다.
김수영 한경닷컴 기자 swimming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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