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배경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AI가 두 가지로 쓰인다는 점이 AI의 언어적 세력을 분산시키는 작용을 하는 것 같다. ‘인공지능’과 ‘조류인플루엔자(avian influenza)’가 그것이다. 즉 ‘AI’와 ‘인공지능’이 경합 중인데, 거기에 ‘조류인플루엔자’가 끼어든 셈이라 할 수 있다. 또 하나 ‘인공지능’이 힘을 받는 데는 언론의 강력한 지원 덕도 고려해봄 직하다. 가령 ‘국제축구연맹(FIFA)’ 같은 표기법을 보자. 언론에서 외래 고유 명칭을 쓸 때 통상 우리말 번역어(‘국제축구연맹’)를 병기하는데, 이는 온전히 독자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다. 이때 영문 약어(‘FIFA’)를 먼저 쓰지 않고 그에 해당하는 우리말을 먼저 적는다. 즉 ‘FIFA(국제축구연맹)’가 아니라 ‘국제축구연맹(FIFA)’이라고 적는 것이다. 이는 우리말 우선주의를 따른 결과다.
언론에서는 오래전부터 이런 전통이 관행처럼 굳어져왔다. 각사의 표기 매뉴얼에 이런 내용이 규정돼 있을 정도다. 이런 관습적 규칙은 마찬가지로 ‘인공지능’과 ‘AI’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즉 현재의 ‘인공지능’이 갖는 언어적 세력은 언론의 의도적이고 인위적인 조력이 더해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영문 약어와 우리말 번역어 사이의 갈등은 이른바 ‘우리말 질서의 문제’에 해당한다. 조금 거창하게 말하면 ‘국어순혈주의 대(對) 혼혈주의’ 또는 ‘민족주의적 언어관 대 글로벌리즘적 언어관’의 세력 다툼인 셈이다. 국어순혈주의 측에선 우리말을 지키고 살려야 한다는 당위적 인식에 토대를 두고 있다. 국어혼혈주의 측에선 인위적으로 영어 사용을 억제하고 우리말 사용을 앞에 내세우는 것은 일종의 ‘설계주의’라고 비판한다. 자유로운 ‘언어의 시장’에서 서로 공정하게 경쟁해 언중이 선택하면 그만이라는 주장이다.
‘인공지능’과 ‘AI’ 중에 궁극적으로 하나만 선택될지 또는 함께 통용될지는 좀 더 시일을 두고 지켜봐야 한다. 넘쳐나는 영문 약어에 대응하려면 좋은 우리말 약어를 많이 확보해야 한다. 줄임말이 주는 효율성에 ‘언어적 일탈’에서 오는 긴장감, 그로 인한 강렬한 메시지 효과 같은 걸 잘 버무려 활용할 필요가 있다.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