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여전히 인공지능(AI), 반도체, 바이오 같은 기술 경쟁의 시대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최근 출간된 <혁신패권>이 제기하는 문제의식은 그보다 한 단계 더 깊다. 이 책이 보기에 오늘날 경쟁은 개별 기술이나 기업의 성취를 넘어 혁신이 지속적으로 재생산되는 ‘생태계’를 누가 구축했는가의 문제로 이동했다. 경영학자인 저자 이영달은 이를 ‘혁신패권’이라 명명하며 21세기 세계 질서의 핵심 동력으로 제시한다.
책의 출발점은 간명하다. 엔비디아, 스탠퍼드대, 실리콘밸리, 그리고 미국이라는 조합이 왜 추격 불가능한 우위를 가지게 됐는가. 저자는 그 이유를 특정 기술이나 정책의 성공에서 찾지 않는다. 이들의 공통점은 혁신을 일회성 성과가 아니라 시간이 흐를수록 더 강해지는 구조적 힘으로 만들었다는 데 있다. 엔비디아는 단순한 반도체 기업을 넘어 개발자와 기업이 빠져나오기 어려운 AI 생태계를 구축했다. 스탠퍼드는 교육기관의 경계를 넘어 창업·연구·자본이 순환하는 거대한 혁신 허브로 진화했고, 실리콘밸리는 지역을 넘어 전 세계가 참조하는 혁신의 원형이 됐다.
책은 이런 현상을 ‘비가역적 혁신질서’로 설명한다. 생태계 주권성, 지속 실행 기반, 생태계 지능이 결합될 때 혁신은 되돌릴 수 없는 패권 구조로 굳어진다는 것이다. 혁신은 사건이 아니라 리듬이며, 지속 성장은 더 크게 확장하는 힘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는 능력이라는 해석도 인상적이다. 한 번의 성공보다 중요한 것은 실패와 시도가 반복되는 구조, 즉 혁신이 일상 속에 내재화된 상태다.이 관점은 20세기 경영 전략과도 차별화된다. 제너럴일렉트릭(GE), 노키아, 코닥처럼 한 시대를 풍미한 기업들이 몰락한 이유를 저자는 무능이나 판단 착오가 아니라 ‘혁신을 지속할 수 있는 생태계의 붕괴’에서 찾는다. 규모의 경제와 효율의 논리가 지배하는 산업자본주의 시대에 통하던 전략들이 플랫폼과 생태계 경쟁의 시대에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다. 경쟁의 단위는 개별 기업이 아니라 생태계 전체로 이동했다.
국가 차원의 분석도 이어진다. 저자는 미국이 기업, 대학, 지역, 자본, 정책을 하나의 생명적 구조로 묶어 혁신이 자생적으로 순환하는 모델을 완성했다고 본다. 대통령 교체와 무관하게 인적 자본, 기술 혁신, 산업 전략이 하나의 리듬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미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혁신 생태계 주도 성장 모델을 체계화한 국가가 됐다는 평가다. 미국의 국방 예산이 더 이상 전통적 군사비가 아니라 AI·반도체·바이오·에너지 등 프런티어 기술을 통합하는 국가 단위 혁신 가속기로 작동하고 있다는 분석, 실리콘밸리 이후 미국 전역으로 확산하는 다핵형 글로컬 혁신 생태계, 대학이 교육기관을 넘어 국가 혁신패권의 ‘중앙신경계’로 변모한 현실 등이 그 예다. ‘엔비디아 시가총액 5조달러’라는 기록 역시 기업 성공담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가 현실화됐음을 알리는 ‘문명적 신호’로 해석된다.
책 후반부에는 젠슨 황, 사티아 나델라, 일론 머스크, TSMC 경영진 등 21세기 혁신 리더들의 사유를 토대로 한 ‘가상 대화’가 등장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혁신을 생산의 문제가 아니라 진화의 문제로 바라본다. 이 대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키워드는 기술이 아닌 리듬이다. 혁신은 생산량이나 효율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체처럼 성장하고 변이하는 ‘생명적 리듬’이라는 것이다. 기술 그 자체보다 기술이 스스로 진화하도록 돕는 환경을 설계하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라고 강조한다. 저자는 AI 이후의 시대를 ‘바이오 인텔리전스(BI) 문명’으로 규정하며 생명, 데이터, 제조, 치료가 통합되는 새로운 패권 경쟁이 이미 시작됐다고 진단한다.
이 책의 특징은 혁신을 경영 기법이나 산업 전략 차원이 아닌 문명적 현상으로 다룬다는 점이다.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와 드러커의 경영 혁신론이 ‘혁신을 만드는 주체’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 책은 혁신이 스스로 살아 움직이게 되는 조건을 묻는다.
국내 독자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세계 질서는 이미 혁신패권 시대로 전환됐지만, 한국의 정책과 담론은 여전히 파편화된 산업 육성과 기술 추격의 프레임에 머물러 있다는 경고다. 우리는 혁신을 만들어 내고 있는가, 아니면 혁신이 살아남을 구조를 만들고 있는가. 지속 성장 혁신 생태계를 구축할 것인가, 구축한 자에게 종속될 것인가.
설지연 기자 sj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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