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고=유엔글로벌콤팩트 한국협회
“기후 행동은 더 강한 경제와 더 많은 일자리, 그리고 더 많은 사람의 더 나은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지난 11월 브라질 벨렝에서 개최된 제30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30) 폐막 연설에서 사이먼 스틸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 사무총장은 ‘삶에 밀착된 기후 전환’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COP30에서 채택된 ‘벨렝 정치 패키지(Belem Political Package)’는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국제적 약속을 구체적 행동과 전환으로 연결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했다. 당사국들은 기후 행동 과정에서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전환 경로의 중요성을 재확인했으며, 오는 6월에는 구체적인 ‘정의로운 전환 메커니즘’ 개발을 위한 협의가 시작될 예정이다.
이제 정의로운 전환은 선언적 원칙을 넘어 국가별 법·정책 설계의 기준으로 자리 잡고 있다. 논의의 범위 역시 기후를 넘어 AI·디지털 기술로 인한 산업구조 변화로 확장되고 있다. 정의로운 전환은 환경과 기술을 아우르는 모든 산업 전환의 경쟁력과 직결되는 과제가 되고 있다.
글로벌: 선언을 넘어 ‘정책 시스템’으로
국제적으로 정의로운 전환 정책의 근간을 형성하는 것은 2015년 국제노동기구(ILO)의 정의로운 전환 가이드라인이다. 이 가이드라인은 녹색경제로의 전환 과정에서 노동자와 지역사회의 사회적 보호, 노사정 사회적 대화, 재교육·재배치, 사회 안전망 보강을 핵심 원칙으로 제시하며 각국 정책 설계의 기준점 역할을 해왔다. 2023년 국제노동회의(ILC)에서도 각국 정책 수립의 핵심 참고 규범으로 재확인됐다.
이러한 원칙은 이후 각국의 기후·산업 전환 정책으로 점차 구체화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2020년 ‘정의로운 전환 메커니즘’을 출범하고, 석탄 의존도가 높은 지역을 중심으로 재정 지원과 노동자 재교육, 지역경제 다각화를 추진해왔다. 유럽 그린딜의 핵심 수단으로 설계된 ‘정의로운 전환 기금(Just Transition Fund, JTF)’은 2021~2027년 약 550억 유로를 투입해 탄소집약 산업 지역의 재훈련·전직·재배치와 중소기업 지원을 병행한다. 전환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완화하는 동시에 회원국들이 구체적 전환 계획을 수립하도록 유도하는 구조다.
이러한 움직임은 EU에 국한되지 않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25년 보고서를 통해 유럽을 포함한 여러 국가에서 녹색 전환이 노동·고용에 미치는 영향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로드맵과 실행계획을 마련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캐나다, 벨기에, 아일랜드, 네덜란드, 스페인 등은 국가 기후 목표와 연계한 고용·기술 전환 정책이 확산됐다. 캐나다는 석탄발전소 폐쇄 지역 노동자 재교육과 지역경제 다각화를 지원하는 ‘석탄 전환 이니셔티브(CCTI)’를 운영하고 있으며, 네덜란드는 강력한 질소 배출 감축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농민들을 지원하기 위한 보상금과 직업 전환 프로그램을 시행 중이다.
이 같은 흐름은 이제 기후를 넘어 기술 전환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다. AI 전환은 기후 전환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산업 전반의 고용 구조를 재편하고 있으며, 이에 따른 사회적 충격도 우려된다.
세계 최초로 2024년 제정된 EU의 AI Act는 채용, 인사 평가, 근로 관리 등 노동자의 기회와 생계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AI 활용 영역을 고위험 분야로 규정했다. 이에 따라 기업들은 이 법이 시행되는 2026년부터 고용 선발 과정에서 AI를 도입할 경우 ‘누가 불이익을 받는지’를 사전에 평가하고 위험과 완화 조치를 문서화하는 의무를 적용받게 된다. APEC과 G20 정상회의에서도 AI 전환 과정에서 포용성과 공정성을 강조하며 국제적 협력의 필요성을 논의했다.
국내: 정의로운 전환 관련 입법 논의 본격화
국내에서도 정의로운 전환을 입법화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정의로운 전환의 법적 근거는 2021년 제정된 ‘탄소중립기본법’으로 마련됐으나, 예산과 실행 절차 등 구체성 결여로 실질적 지원 체계로서는 한계가 명확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제22대 국회 들어서만 3건의 ‘정의로운 전환 특별법’이 발의됐다.
그중 2025년 5월 발의된 ‘석탄화력발전소 조기 폐지 및 정의로운 전환 지원에 관한 특별법안’(박지혜 의원 등 13인)은 석탄발전소 조기 폐지를 목표로 하면서, 그 과정에서 노동자와 지역사회를 위한 지원 대책을 보다 구체적으로 담아 관심을 끌었다. 가장 최근(2025년 11월) 원내 3당이 공동발의한 ‘석탄화력발전 중단과 정의로운 전환에 관한 특별법’은 석탄발전 단계적 중단 과정에서 고용 보호와 지역경제 지원을 국가 책임으로 명시했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국내에서 정의로운 전환은 2025년 12월 태안화력 1호기 폐지를 시작으로 2038년까지 총 37기의 발전소가 순차적으로 폐지될 예정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시급한 정책 과제가 되고 있다. 2026년 고용노동부 업무보고에 ‘정의로운 전환’이 공식 포함되며 산업 전환 고용안정 기본계획 수립과 특별지구 지정 논의가 시작됐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전환의 또 다른 축인 AI 역시 유사한 과제를 던진다. 기술 도입 속도와 사회 수용 속도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문제가 핵심이다. 실제로 국내에서는 ‘AI 전환’과 고용·훈련을 분리하지 않고 다루려는 논의가 빠르게 늘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2025년 하반기 ‘AI 산업 전환과 일자리’ 포럼 최종 보고회를 열어 AI 전환기 모니터링, 맞춤형 직업훈련 등 일자리 정책 로드맵을 예고한 바 있다.
EU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포괄적 AI 법을 도입한 한국도 2026년 1월 ‘AI 기본법(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 시행을 앞두고 있다. 이 법은 큰 틀에서 AI 산업의 ‘진흥’과 신뢰·안전 기반의 활용을 중심에 두고 있어 ‘정의로운 전환’의 주요 화두인 고용 전환과 충격에 대한 구체적 분담·지원 절차를 규정하고 있지 않다. 또 EU의 AI Act보다 AI 사용에 관한 책임 소재나 범위가 제한적이라는 점도 보완이 필요한 부분이다. AI 확산의 고용 영향과 사용 책임에 관한 별도의 정책을 마련해야 하는 과제가 더욱 선명해지고 있는 이유다.
기후 전환과 AI 전환은 서로 다른 정책 영역 같지만, 던지는 질문은 같다. “전환 비용과 충격을 누가, 어떻게 감당하고 우리는 무엇을 합의해나가야 할 것인가.” 이를 위해서는 제도와 규범을 속도감 있게 만들고, 포괄적인 사회적 대화가 필요하다. 기후와 AI라는 대전환의 길목을 지나고 있는 지금, ‘정의로운 전환’은 새로운 사회계약 원칙이다. 그 원칙을 더욱 구체화하고 성실하게 구현하느냐가 지속가능한 미래, 그리고 미래 국가경쟁력을 좌우하게 될 것이다.
UNGC 한국협회 소개
유엔글로벌콤팩트(UNGC)는 세계 최대 기업 지속가능성 이니셔티브로, 기업들이 지속가능 발전목표 달성과 ESG 경영을 내재화하도록 가이드라인과 플랫폼을 지원하고 있다. UNGC 한국협회는 다양한 파트너들과 국내 ESG 생태계 조성을 지원하고 정의로운 전환 관련해서도 기업들의 실행 방안을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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