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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칼럼] 대통령실 '환율 간담회'의 역설

입력 2025-12-22 17:41   수정 2025-12-23 00:44

기업들과의 활발한 교류만큼 이재명 정부가 기존 진보 정부와 차별화되는 지점도 없을 것 같다. 문재인 정부 땐 청와대 참모가 부처 장관의 기업 방문을 비판했던 일도 있다. 2018년 8월 김동연 당시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혁신 성장 점검’ 명분으로 현대자동차, SK, LG그룹에 이어 삼성전자를 방문하려 하자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이 ‘재벌에게 투자·고용을 구걸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취지의 우려를 전달했다는 보도가 나와 큰 소동이 일었다. 일부 대기업에 투자·고용을 의존하면 재벌 개혁 의지가 약해질 수 있다는 당시 주류 진보 좌파 진영의 시각이다.

반면 현 정부는 장관을 넘어 대통령, 여당까지 기업인과 활발히 만나고 있다. 이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빠르게 취임 후 열흘 만에 재계 총수를 만나 정부와 기업의 ‘원팀 정신’을 강조했다. 6개월여 만에 크고 작은 행사에서 열 번 넘게 총수들을 만났다. 더불어민주당도 원내대표, 코스피5000특별위원회 등 각종 위원회 소속 의원이 법 개정 의견 수렴 명목 등으로 수시로 경제인·경제단체와 간담회를 열었다.

기업의 반대에도 여당이 노란봉투법, 상법을 강행 통과시킨 것처럼 이런 만남이 ‘요식 행위’에 머문 때도 있지만 몇몇 분야는 큰 성과로 이어졌다. 정부가 최대 난제였던 미국과의 관세협상을 무난히 타결한 게 대표적이다. 정부는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요구를 먼저 파악하고 조선사 등 기업은 감당 가능한 ‘투자 보따리’를 협상 카드로 제시해 시너지를 냈다. 이 대통령이 관세협상 타결 직후 “지금까지 정부와 기업이 이렇게 합이 잘 맞아 공동 대응한 사례가 없었던 거 같다”고 했을 정도다. 금산분리 완화 논란 속에서도 반도체 투자 확대를 위해 지주회사 지분율 규제를 일부 푼 것도 정부로선 작지 않은 결단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이 지난주 삼성전자, 현대차 등 7개 수출 기업 관계자를 소집해 고환율 대응 간담회를 연다는 본지 특종 기사를 접했을 때 처음엔 믿어지지 않았다. 한 대기업 임원은 “쌍팔년도에나 나올 법한 제목의 기사가 나와 깜짝 놀랐다”며 “누가 봐도 기업에 달러를 팔라고 강요한 것 아니냐”고 했다. 대통령실은 연말 연초 환전 계획, 내년 해외 투자 규모, 달러 조달 및 헤지 전략도 기업에 요청했다고 한다. 일부 조선사는 간담회 후 달러 선물환 매도를 검토하고 있다.

대통령실의 절박함은 이해된다. 국민연금에 환헤지를 독려하는 등 정부와 한국은행이 연일 대책을 쏟아내지만 환율은 요지부동이다. ‘관치’ 비판을 받아도 달러 공급을 한 푼이라도 늘릴 대책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부가 체결한 관세협상 때문에 달러 보유 필요성이 높아진 기업에 달러 매도를 강요하는 건 아무리 봐도 원팀 정신에 어긋난다.

반짝 효과는 몰라도 중장기 대책이 될지 의문이다. 한 중소 유통사 사장은 “근본 대책이 없으니 정부가 무리수를 둔 것 같다”며 “역설적으로 보유한 달러를 팔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정부가 연말 환율 종가 관리를 과도하게 하면 기업들이 재무제표에 흔적이 남는 연말까진 달러 매수를 자제하겠지만 내년 초 추격 매수에 나서며 원·달러 환율이 순식간에 1500원을 뚫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는 코로나19 때보다 외환시장 충격이 훨씬 컸다. 이건 2000년대 초중반 국민연금과 조선사의 환헤지가 핵심 이유 중 하나였다. 이들의 헤지를 받아주다 3~4배 폭증한 은행권의 단기 외화 차입금이 위기 때 만기 연장이 안 돼서다. 이 교훈 때문에 환헤지를 중단·축소한 국민연금과 조선사에 다시 환헤지를 강요하는 건 외화 유동성 불균형 위험을 키우는 행위다.

고환율 고착화는 성장률과 실질금리 하락으로 한국의 투자 매력이 떨어지면서 나타난 구조적 문제다. 대증 요법이 아니라 근본 대책이 필요하다. 과감한 규제 완화, 노동 유연성 확대 등 구조 개혁을 통해 잠재성장률을 높여 개미도, 기업도, 국민연금도, 외국인도 한국 투자에 눈을 돌리게 해야 한다. 기업인 등의 해외 탈출로 인한 ‘구조적 달러 수요’를 줄이기 위해 상속세율 인하도 검토할 만하다. ‘기업 압박’이 아니라 ‘기업하기 좋은 환경 만들기’가 근본적인 환율 대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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