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에서도 AI는 더 이상 기술 담론의 영역에 머물지 않는다. 이미 이 지역에서 AI는 생산성을 끌어올릴 새로운 성장 동력이자, 동시에 노동시장과 산업 구조 전반에 변화를 요구하는 현실적 변수로 작동하고 있다. 저임금 제조업, 단순 사무직, 반복적인 서비스 노동의 비중이 높은 동남아의 산업 구조를 감안하면, AI 도입은 분명한 기회인 동시에 사회적 비용을 동반하는 양날의 칼이다.
그런데도 동남아 국가들의 AI 대응 속도는 예상보다 빠르다. 다만 이 지역의 AI 전략은 미국이나 중국처럼 신규 기술 개발에 집중하지 않지만, AI를 실제로 구동할 수 있는 조건, 즉 데이터센터와 컴퓨팅 인프라, 전력과 토지, 규제 환경을 먼저 확보하는 단계에 가깝다.
이 흐름은 AI 컴퓨팅 지형을 빠르게 바꾸고 있다. 2020년 이전까지만 해도 동남아시아 데이터센터 산업의 중심지는 일본과 싱가포르였다. 안정적인 전력 공급과 통신 인프라, 규제의 예측 가능성을 갖춘 국가들이 자연스럽게 AI 이전 시대의 데이터센터를 흡수해 왔다. 그러나 생성형 AI가 확산하면서 막대한 연산 능력을 요구하는 AI 데이터센터가 등장했고, 기존 인프라만으로는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이 변화가 가장 극적으로 나타난 곳이 말레이시아 조호르(Johor)주다. 싱가포르 도심에서 차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 물가 저렴하고 교육 환경 좋은 신도시로 알려졌던 이 지역에는 불과 2~3년 전까지만 해도 대규모 슈퍼 컴퓨팅 데이터센터가 없었다. 그러나 현재 조호르의 AI 데이터센터 용량은 싱가포르가 10여 년에 걸쳐 구축해 온 규모에 필적할 정도로 빠르게 확대되고 있으며, 추가 확장도 예정돼 있다.
말레이시아가 주목받는 이유는 비교적 단순하다. 싱가포르에 비해 저렴한 토지 비용, 상대적으로 완화된 규제 환경, 그리고 아직 여력이 남아 있는 전력 공급 능력이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AI 데이터센터를 차세대 성장 산업으로 인식하며 세제 혜택과 인허가 절차 간소화를 병행하고 있다. 말레이시아의 AI 전략은 자체 기술 개발보다는 ‘플랫폼 제공자’에 가깝다. AI를 직접 만드는 국가라기보다, AI가 작동할 수 있는 물리적 토대를 제공하는 국가로 방향을 잡고 있다.
이와 달리 싱가포르는 국토 면적과 전력 사용량, 환경 부담이라는 구조적 한계 속에서 무작정 데이터센터를 늘리기보다, 고부가가치 AI 활용과 규제 설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공공 행정, 금융, 헬스케어, 스마트시티 분야를 중심으로 실증 중심의 AI 도입을 빠르게 진행하고 있으며, ‘AI를 어디에 쓸 것인가’에 대한 국가 전략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그 결과 싱가포르는 정책·기획·금융 허브로, 말레이시아는 연산과 저장 거점으로 역할이 분화되는 구조가 점차 확립되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2억8천만 명에 달하는 인구와 방대한 디지털 소비 시장을 기반으로, AI 수요 자체가 가장 큰 국가다. 전자상거래, 핀테크, 모빌리티, 콘텐츠 추천 분야에서 AI 활용이 이미 일상화됐다. 최근에는 LG CNS가 1000억원 규모의 AI 데이터센터를 짓고 있는 수도 자카르타 외에도 싱가포르 인접 지역인 바탐, 동부 자바 등으로 데이터센터 입지가 다변화되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핵심 자산은 축적되는 데이터의 규모지만, 이를 위한 전력 인프라 안정성과 규제 일관성은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베트남은 대규모 하이퍼스케일 경쟁보다는 제조업과 결합한 AI 활용에 무게를 두고 있다. 북부 산업단지와 남부 호치민 인근을 중심으로 스마트팩토리, 물류 자동화, 산업용 AI가 확산하고 있으며, 데이터센터 역시 산업단지와 결합한 형태로 구축되는 경우가 많다. AI를 독립적인 기술 산업으로 키우기보다는 제조 경쟁력을 보완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전략이 비교적 분명하다.
태국은 동부 경제회랑(The Eastern Economic Corridor: EEC)을 중심으로 데이터센터와 디지털 인프라를 국가 발전 전략에 포함하고 있다. 연구 개발보다는 관광, 헬스케어, 공공 서비스 등 데이터 활용도가 높은 산업에서 AI를 적용해 행정 효율과 서비스 품질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태국 역시 AI 전략은 기술 자립보다는 실용적 응용에 가깝다.
이처럼 동남아 AI 산업은 아세안 전체적으로 비슷한 전략으로 나아가는 듯하지만, 국가별 역할은 분화되고 있는 모습이다. 싱가포르는 규범과 금융 허브, 말레이시아는 연산 인프라, 인도네시아는 대규모 데이터와 시장 제공, 베트남은 제조 연계, 태국은 서비스 적용이라는 구도가 비교적 뚜렷해지고 있다. 공통점은 AI 자체 기술보다 AI가 작동하기 위한 조건을 먼저 확보하려는 전략이라는 점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주목할 변화는 생성형 AI의 사용자 기반이다. 딜로이트 그룹이 2024년에 발표한 '아시아 태평양 지역 내 생성형 AI 업무 활용 현황'을 살펴보면, 동남아 주요 국가에서 생성형 AI 사용자 인구 비율은 76%로 조사됐으며, 이는 미국의 특정 주나 유럽의 특정 국가보다 월등히 높다. 특히 인도네시아, 필리핀, 베트남에서는 모바일 기반 생성형 AI 이용 비중이 높고, 번역·요약·과제 작성·콘텐츠 제작·소상공인 마케팅 등 실용적 목적의 활용이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동남아에서 생성형 AI는 ‘업무 혁신’보다는 생산성 보조 수단에 가깝다. 학생은 과제를 작성하고, 소상공인은 광고 문구를 만들며, 프리랜서는 번역과 초안 작업에 활용한다. 이러한 개인과 소규모 사업자 중심의 확산은 연산과 저장 수요 증가로 이어지고,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를 자극하는 구조를 만든다.
그러나 이 AI 붐은 동시에 새로운 부담을 남긴다. 대규모 데이터센터는 막대한 전력과 물이 필요하고, 탄소 배출과 환경 문제를 동반한다. 더 근본적으로는 AI가 생산성 보조 수단을 넘어 업무 혁신을 만들어 낼 때, 기존의 저임금 인력 구조를 얼마나 빠르게 흔들 것인가라는 질문이 남는다. 단순 사무직과 반복 노동이 많은 동남아에서, AI의 충격은 가장 취약한 계층부터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말레이시아 조호르에서 시작된 AI 데이터센터 붐은 그래서 단순한 산업 뉴스가 아니다. 이는 동남아가 AI 시대에 어떤 역할을 선택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글로벌 AI 산업의 연산과 저장을 담당하는 인프라 지역으로 남을 것인가, 응용 강국으로 전환할 것인가, 아니면 기술 종속의 위험을 감수할 것인가. 동남아의 AI 경쟁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이성득 인도네시아 UNAS경영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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