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세상에 처음 등장한 ‘룸바(Roomba)’는 단순한 가전제품이 아니었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인공지능연구소의 천재들이 화성 탐사와 전장의 지뢰 제거 로봇 기술을 거실로 옮겨온 ‘딥테크’의 결정체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2025년 12월, 로봇청소기 원조개발사 아이로봇은 델라웨어법원에 파산을 신청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회사의 새 주인이 그들의 제품을 대신 만들어주던 중국 하청업체 ‘피시아(Picea)’라는 사실이다.아이로봇은 MIT 인공지능연구소의 로드니 브룩스 교수와 그의 제자들이 1990년 창업한 테크기업이다. 화성 탐사 로봇의 모태인 6족 보행로봇 ‘징기스’, 9·11 테러 직후 그라운드제로 잔해수색 작업에 투입돼 유명해진 ‘팩봇’으로 기술력을 세계에 알렸다. 이런 로봇 기술이 집약된 룸바는 애플의 ‘아이팟’과 함께 혁신의 아이콘으로 꼽히며 로봇청소기 시대를 열었다.
아이로봇의 몰락은 테크기업이 맹신해온 ‘팹리스’(설계 전문) 모델의 치명적 한계를 드러낸다. 아이로봇은 “우리는 머리(설계와 데이터)만 쓰고, 손발(제조)은 남에게 맡긴다”는 자산 효율화 전략을 취했다. 그러나 생산을 맡은 중국의 피시아는 단순 조립만 하는 하청업체에 머물지 않았다. 도면을 만지며 기술을 흡수했고, 자체 연구개발(R&D) 역량을 키웠다. 아이로봇이 외면한 진공·물걸레 청소 통합 기능과 라이다 센서 기술을 갖춘 ‘올인원’ 로봇청소기를 먼저 완성했다. 하드웨어 혁신은 설계도 위가 아니라 매일 공장에서 원가를 절감하고 공정을 개선하는 과정에서 완성된다. 제조 역량을 외부에 통째로 넘긴 아이로봇은 비용구조를 통제할 능력을 잃었고, 결국 피시아의 납품 대금 1억6000만달러를 갚지 못해 경영권을 넘겨야 했다.
아이로봇 사례는 ‘혁신은 일상이 되는 순간 죽는다’는 ‘범용화의 저주’를 보여준다. 퍼스트 무버는 시장 개척의 막대한 비용을 홀로 감내하지만, 패스트 팔로어는 검증된 길 위에서 더 싸고 좋은 제품으로 추격한다. 아이로봇이 카메라 기반의 고전적 매핑 방식과 ‘가정 내 데이터 플랫폼’이라는 환상에 빠져 있는 동안 중국의 로보락, 드리미는 자율주행 기술인 라이다를 보급형에까지 탑재하며 “룸바보다 똑똑하고 싼 중국산”이라는 새 공식으로 시장을 장악해갔다. 소비자는 데이터 플랫폼형 청소기보다 바닥의 라면 국물을 말끔히 치워주는 강력한 물걸레와 장애물을 똑똑하게 피하는 가성비 제품을 택했다. 2021년 50%에 육박한 룸바의 점유율이 불과 4년 새 한 자릿수로 추락한 것은 기술적 자만이 시장의 실용주의적 요구를 무시했을 때 벌어지는 참혹한 결과다.
여기에 규제의 역설이 더해졌다. 2022년 아마존의 17억달러 인수 시도를 규제당국이 빅테크 독점을 우려해 막아섰다. 최종 결정을 기다리는 2년간 경쟁사들은 공세의 고삐를 조였다. 결과는 아이로봇의 독점 방지가 아니라 미국 기술 상징 기업의 파산과 중국으로의 지식재산권 이전이었다. 아이로봇의 사례는 오픈AI 등 생성형 인공지능(AI) 시장을 이끄는 퍼스트 무버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초기의 우위는 영원한 기술적 해자가 될 수 없으며, 선도자는 언제든 ‘비운의 개척자’로 남을 수 있다는 점이다.
2021년 16억달러로 정점을 찍은 아이로봇의 매출은 올해 3분의 1로 쪼그라들었다. 주가는 고점 대비 99% 폭락해 동전주가 됐다. 수천만 가구의 바닥은 깨끗이 치웠지만, 정작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은 ‘제조 경시’와 ‘기술적 오만’의 장애물은 피하지 못해 피시아의 전리품 신세가 됐다. 제조 역량을 상실한 ‘퍼스트 무버’의 종말, 아이로봇이 파산으로 남긴 값비싼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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