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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은경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존재했다 [김예랑의 씬터뷰]

입력 2025-12-25 08:10  


배우 심은경은 익숙함을 내려놓고 낯선 세계로 향했다. 한국 영화계에서 일찌감치 연기력을 인정받은 그는 전성기의 한가운데서 일본행을 택했고, 그 선택은 영화 '신문기자'(2019)를 통해 일본 아카데미상 최우수 여우주연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언어도 시스템도 다른 환경에서 그는 다시 초심처럼 연기를 마주했고, 그렇게 쌓아 올린 시간이 지금의 심은경을 만들었다. 한·일을 오가며 성실한 행보를 이어온 그는 미야케 쇼 감독의 신작 '여행과 나날'을 통해 또 한 번 조용하지만 깊은 변주를 선보였다.

영화 '여행과 나날'은 독립예술영화임에도 입소문을 타며 지난 24일 개봉 15일 차에 4만 관객을 돌파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느낀 각본가 '이'가 설국의 작은 여관에서 낯선 이들과 시간을 보내며 다시 삶을 향해 발을 내딛는 겨울 여행담이다. 담담한 표정으로 시작하지만 그 안에는 기대와 설렘, 다시 살아가려는 의지가 미세하게 흔들린다.

'여행과 나날'은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새벽의 모든' 등으로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연이어 초청되며 일본 영화계 차세대 감독으로 자리매김한 미야케 쇼 감독의 신작이다. 지난 8월 열린 제78회 로카르노국제영화제 국제경쟁 부문에 초청돼 최고상인 황금표범상을 수상하며 주목을 받았다.

미야케 쇼 감독은 요시하루의 만화 '해변의 서경'과 '혼야라동의 벤상'을 토대로 2020년부터 이 작품의 각본을 집필했다. 원작에서 중년 일본 남성 만화가였던 주인공의 국적과 성별을 바꿀 정도로 그는 심은경이라는 배우를 위해 글을 썼다. 두 사람의 인연은 영화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이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됐을 당시 토크 프로그램에서 처음 만난 것을 계기로 시작됐다.


심은경은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당시를 떠올리며 "읽자마자 '감독님이 어떻게 나에 대해서 이렇게 잘 알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극 중 인물이 자신의 영화로 학생들 앞에서 GV를 하며 "저는 재능이 없는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장면에 강하게 이끌렸다고 했다. 그는 부족함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태도가 용기 있게 느껴졌고, 그 자세가 마음을 움직였다고 설명했다.

영화에서 심은경이 연기한 '이'는 창작의 벽에 부딪혀 방황하다 무작정 여행을 떠난 한국 출신 시나리오 작가다. 도쿄와는 전혀 다른 설국의 작은 마을, 외딴 여관에 머물며 주인 '벤조'(츠츠미 신이치)를 만나 잊고 있던 언어와 감정의 조각을 조금씩 되찾아간다. 미야케 쇼 감독은 이 인물에 대해 "지금까지 스크린에서 본, 지금까지 연기한 역할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라고 평가하며, "심은경이 우리를 더 멀리 데려다 줬다"고 극찬했다.

심은경에게 '여행과 나날'은 연기적으로도 전환점이 된 작품이다. 그는 "이런 영화를 오래전부터 해보고 싶었다"고 털어놓으며, 이번 작품에서는 덜어내는 연기를 선택했다고 밝혔다. 촬영 당시 감독에게 "이번 영화에서는 아무것도 안 할 예정"이라고 농담처럼 말했는데, 감독이 "아무것도 안 하는 심은경을 찍을 수 있는 행운"이라고 답해줬다고 웃으며 전했다. 그는 여백을 의식하며 연기한 점이 특히 인상 깊었다고 짚었다.

대사가 많지 않은 연기에 대해 그는 "아무것도 안 했다는 뜻은 아니다"라고 전제하며 "카메라 안에서 존재하는 것 자체가 연기"라고 설명했다. 이어 "모든 감정을 다 표출하지 않아도 프레임과 프레임이 연결되며 영화가 완성된다"며, 매 순간 힘을 줄 필요는 없다는 점을 이번 작품을 통해 다시 깨닫게 됐다고 부연했다. 작은 움직임 하나, 멈춰 있는 선택 하나까지 감독과 치밀하게 상의하며 만들어갔다고 덧붙였다.


영화에는 한국어 대사와 글씨, 내레이션도 등장한다. 이는 촬영 이후 후반 작업 과정에서 추가된 요소다. 심은경은 "촬영 내내 감독님이 저를 관찰했다"며 일본어로 연기할 때와 한국어를 사용할 때 전혀 다른 결이 느껴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그는 "모국어이기 때문에 필요한 부분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설국의 공간 역시 배우에게 강렬한 체험으로 남았다. 그는 "여관이 정말 추웠다"고 웃으며 회상하며, 그 추위를 느끼는 감정이 연기와 현실이 섞이며 자연스럽게 담긴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여름 편 후반부에 등장하는 파도 장면을 가장 좋아하는 장면으로 꼽으며 "스크린으로 영화를 본다는 행위가 이런 감각을 느끼기 위해 존재하는 것 아닐까 싶었다"고 전했다.

미야케 쇼 감독에 대한 존경도 여러 차례 드러냈다. 심은경은 "동시대 최고의 감독님이라고 생각한다"고 평가하며, 사려 깊고 배려심이 깊으며 영화에 대한 사랑이 누구보다 큰 인물이라고 말했다. 촬영 전 감독이 모든 스태프에게 보낸 편지를 언급하며 "영화는 혼자 만드는 작업이 아니라 함께 만드는 작업이라는 걸 체감했다"고 밝혔다.

심은경은 2011년 영화 '써니'로 대중과 평단의 주목을 받았고, '수상한 그녀'로 백상예술대상 최우수 여자연기상을 수상했다. 이후 일본으로 활동 무대를 넓혀 '신문기자'로 일본 아카데미상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그는 일본 활동에 대해 "후회한 적은 없다"고 단언하면서도, 스스로 재능이 없는 것은 아닐지 의심한 순간은 있었다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그는 "재능이 없을 수도 있고 천재가 아니어도 괜찮다"고 말하며, 연기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계속해오고 있는 것 같다고 담담히 전했다. 연기하는 순간의 희열에 대해서는 "힘들어도 그 순간만큼은 신이 나서 웃고 있는 상태"라고 표현했다.


'여행과 나날'이 자신의 이야기처럼 느껴진 이유에 대해 그는 "언어의 벽 앞에서 내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했던 지점이 닮아 있는 듯하다"고 짚으며, 극 중 각본가 '이'는 결국 관객 각자일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심은경의 차기작은 NHK 100주년 기념 드라마 '화성의 여왕'과 내년 상반기 공개 예정인 한국 드라마 '대한민국에서 건물주 되는 법'이다. 그는 블랙코미디 장르를 좋아한다며, 연기적으로도 또 다른 도전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22년차 중견배우인 그는 "자신에게 기대려고 하지 않게 됐다"고 최근 변화한 심경을 전했다. 그는 "어릴 때는 미래의 나를 설계했던 것 같은데 뜻대로 되는 건 아니니까, 오늘 하루를 최선을 다해 사는 게 더 중요한 것 같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한다면 언젠가 내가 가고자 하는 길에 반갑게 닿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설국의 여관에서 시작된 각본가 '이'의 조용한 여정처럼, 심은경 역시 조급하지 않은 걸음으로 배우의 길을 걷고 있다. '여행과 나날'은 그가 다시 확인한 연기의 본질이자, 말하지 않아도 전해질 수 있는 감정의 기록이다.


김예랑 한경닷컴 기자 yesr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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