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블레이크
나는 친구에게 화가 났네.
그에게 분노를 말했더니 분노는 사라졌네.
나는 원수에게 화가 났네.
그에게 말하지 않았더니 분노는 자라났네.
나는 무서워서 분노에 물을 주었네.
밤낮없이 내 눈물로 적셨네.
나는 그것을 미소로 햇볕에 쬐었네.
부드럽고 기만적인 아양으로 키웠네.
그 나무는 밤낮으로 자랐네.
마침내 빛나는 사과를 맺었네.
내 원수는 그것이 빛나는 것을 보았네.
그리고 그것이 내 것임을 알았네.
밤이 하늘을 가린 사이에
그는 내 정원으로 몰래 들어왔네.
아침에 나는 기뻐하며 보았네.
그 나무 아래 뻗어 있는 내 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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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첫 4행에서 분노의 근본 원인과 분노의 독을 풀어줄 해독제를 동시에 보여줍니다. 시인은 친구에게 화가 날 때 말을 함으로써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적을 대할 때는 입을 다물었고 분노를 키웠습니다.
마치 아메리카 인디언의 ‘두 마리 늑대’ 이야기와 같습니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이렇게 말하지요. “내 안에는 서로 이기려고 싸우는 두 마리 늑대가 있지. 하나는 악이란다. 악한 늑대는 분노와 증오, 시기, 탐욕, 오만, 원한, 죄책감, 열등감, 거짓말, 이기심이지. 두 번째는 선이란다. 이 늑대는 기쁨과 사랑, 공감, 평화, 희망, 조화, 겸손, 친절, 관대함, 진실, 연민, 신뢰지. 이 둘은 죽을 때까지 싸우는데 그런 싸움이 네 안에서도 벌어지고 있단다.” 손자가 “그래서 누가 이겨요?”라고 묻자 노인은 답합니다. “그건 내가 누구에게 먹이를 주느냐에 달려 있지.”
역사를 보면, 로마 공화정 말기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분노’ 때문에 ‘독 사과’를 먹고 ‘뻗어’버린 인물이지요. 둘은 카이사르의 폭정을 끝낸다는 명분으로 칼을 들었지만, 그 칼끝은 결국 자신과 공화정의 숨통을 끊어 놓았습니다.
카이사르가 급속도로 권력을 움켜쥐는 통에 사람들이 불안과 혐오에 사로잡힌 것을 보고,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두려움이라는 재료를 바탕으로 사람들의 분노를 부추겼지요. 공화정이 끝날지 모른다는 공포, 자신들의 자리가 위태롭다는 불안, ‘역사가 우리를 어떻게 기록할까’라는 두려움이 모두 분노의 ‘물’이 되었습니다.
브루투스는 특히 그랬습니다. 그는 카이사르에게 은혜를 입기도 했기에 “이건 살인이 아니라 수술이다. 폭군을 제거하면 공화정은 되살아난다.” 이런 명분으로 자신을 설득했습니다. 이럴 때 분노는 온갖 명분과 ‘기만적인 아양’의 거름을 먹고 자랍니다. ‘정의’라는 단어는 얼마나 부드러운가. ‘자유’라는 구호는 얼마나 환한가. 그러나 그 햇볕이 따뜻할수록 독은 더 잘 익습니다.
카시우스는 다른 방식으로 분노의 나무를 키웠습니다. 그의 분노는 명분보다 모욕과 질투에 가까웠고, 그래서 더 직설적이었습니다. 직설적인 분노는 더 쉽게 아군을 만들고, 더 쉽게 ‘행동’을 불렀습니다. 이렇게 둘은 서로의 분노를 비료로 삼아 독 사과를 키웠습니다.
마침내 44년 3월 15일, 이들은 카이사르를 죽였습니다. 카이사르가 쓰러졌을 때 이들은 잠시 승리감에 도취했겠지만, 분노가 낳은 행동은 대개 그 이후를 준비하지 못합니다. 암살 직후부터 독이 번졌습니다. 민중은 단순히 ‘자유’라는 구호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공화정의 회복이 아니라 내전의 문이 열렸습니다. 분노가 ‘사람’을 제거하면 ‘문제’가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지만, 이는 더 큰 부메랑이 돼 이들을 덮쳤습니다.
시인이 “밤이 하늘을 가린 사이에/ 그는 내 정원으로 몰래 들어왔네”라고 묘사했듯이 밤은 음모의 밤이기도 하고, 결과의 밤이기도 했습니다. 공화정의 이름으로 휘두른 칼이 로마 전체를 어둠으로 밀어 넣었고, 그 밤이 깊을수록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독을 먹인 적’이면서 동시에 ‘독을 먹은 자’가 됐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지키려 했던 공화정마저 더 멀어지게 했습니다.
이들이 분노를 ‘칼’이 아니라 ‘말’로 먼저 다스렸다면 어땠을까요. 카이사르의 권력 남용을 공개적으로 견제하고, 동맹과 법 절차를 통해 시간을 벌며, 시민의 불안을 설득하는 정치를 펼쳤다면 역사는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흔히 “복수를 계획하기 전에 무덤을 두 개 파야 한다”고 말합니다. 분노가 자신을 해치기도 하기 때문이지요. 평소 남을 미워하고 적개심에 사로잡혀 스스로 소모하는 사람은 스트레스 관련 질환과 심장마비에 걸릴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의사들은 만성 분노를 흡연과 나쁜 식습관만큼이나 심각한 심혈관 질환 위험 요인으로 꼽습니다.
다행히 분노 조절에 도움을 줄 방법은 많습니다. 어쩌면 이 시를 읽는 게 출발점일 수 있습니다. 친구에게 ‘말을 해서’ 사라지는 분노와 적에게 ‘말을 하지 않아서’ 자라는 분노. 시인은 아메리카 인디언 노인의 말을 빌려 이렇게 덧붙일지도 모르지요. “두 늑대 중에서 이기는 쪽은 내가 말을 건네는 쪽이지!”
전문가들의 조언을 몇 가지 살펴볼까요. 무엇보다 ‘나에게 분노의 원인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중요하다는데 이건 참 쉽지 않아 보입니다. 분노하는 사람은 대개 자기 분노를 상황 탓으로 돌리며 이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면서 책임을 회피하려 하지요. 그런 만큼 분노 그 자체가 문제일 수 있다는 점을 먼저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런 다음 분노를 빨리 없애는 구체적인 방법을 체득하는 게 필요하겠지요. 제가 발견한 방법 중에서는 ‘분노 유발 고리’를 반대로 돌리는 법이 가장 눈길을 끕니다. 예를 들면 이 시에 나오는 “무서워서 분노에 물을 주었네”와 그것을 “햇볕”과 “아양”으로 키우는 과정을 반대로 돌리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하는 행동 지침이 ‘10초 호흡’입니다. 누군가 분노를 유발한다면 즉시 반응하지 말고 10초 동안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1부터 10까지 세는 것입니다. 이 같은 ‘진정 호흡’이 분노를 다스리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만약 회의 중에 상대가 마음에 상처를 주거나 빈정거리는 말투를 쓸 땐 바로 쏘아붙이지 말고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분노를 멈춘 뒤 10초 동안 숨을 코로 들이마시고 입으로 내쉰 다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방금 표현이 제게는 공격적으로 들렸습니다. 의도를 확인해도 될까요?” 분노의 말 대신 ‘확인 질문’으로 전환하는 것이지요. 그 효과는 생각보다 크다고 합니다.
또 다른 방법은 ‘단정적인 해석 줄이기’입니다. 분노가 커지는 이유는 머릿속에 확신과 단정이 먼저 자리 잡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저건 나를 깎아내리는 의도야.” 이때는 사실과 해석을 분리해서 한 번 점검하는 게 중요하지요.
서양 의사들이 추천하는 방법 중에는 ‘열(熱) 낮추기’도 있습니다. 운동과 산책은 ‘열’을 빼는 좋은 방법이라고 합니다. 퇴근 후 분노가 남아 집에서 폭발할 것 같으면 집에 들어가기 전 10분 이상 빠르게 걷거나 운동하는 시간을 갖고 분노의 열을 낮추라고 합니다. 미국 메이오 클리닉에서도 운동을 분노 조절 팁의 하나로 추천합니다.
한 해를 보내면서 ‘분노를 없애는 법’으로 자신을 맑게 헹구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 계획을 세우면서 ‘희망을 품은 나무’를 멋지게 키우시기 바랍니다. 새해 복을 30배 60배 100배 받으세요.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등 출간. 김달진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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