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양을 제거하려면 신경을 끊어야 합니다. 손과 다리, 둘 중 하나만 살릴 수 있습니다. 보호자께서 선택을 내리셔야 합니다. 어디를 살려야 할까요.”
수술실 문을 열고 나온 의사는 병원 복도에 앉아 있던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수술대에 누워 있는 남편을 평생 휠체어에 앉아 살게 할 것인가, 아니면 평생 손을 쓰지 못하는 사람으로 만들 것인가. 잔혹한 선택을 강요받은 아내의 눈에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래도 아내는 남편을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그녀는 눈물을 닦고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손을 살려주세요. 그는 화가입니다. 손이 없다면 그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을 겁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습니다. 남편은 목숨을 건졌습니다. 하지만 그는 두 번 다시 제 발로 땅을 딛지 못하게 됐습니다. 낙담한 그는 말했습니다. “이제 이 좁은 방 안이 내 세상의 전부구나.”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 좁은 방의 휠체어 위에서 남자의 작품은 이전보다 훨씬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극심한 통증과 가난에 굴복하지 않고 남자는 죽는 순간까지 캔버스에 화려하고 즐거운 세상을 그려냈습니다. 가장 러시아적인 풍경을 그린 화가이자, 불굴의 의지로 고통과 싸운 남자. 러시아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 중 한 명인 보리스 쿠스토디예프(1878~1927·보리스)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가난한 소년 보리스는 셋방 문틈 너머로 부자들의 삶을 관찰했습니다. 기름진 음식, 시끌벅적한 축제, 화려하게 장식된 마차, 사람들의 활기찬 에너지. 보리스는 자신이 그 풍경 속에서 즐겁게 뛰어노는 상상을 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내는 법을 배웠습니다.

보리스가 처음으로 미술을 접한 건 열한살 때. 러시아 미술을 대표하는 거장들의 작품을 전시회에서 본 게 계기였습니다. 그는 그림 속 아름다운 세계에 압도당했습니다. ‘그림으로 내 상상을 현실에 표현하고 싶어.’ 보리스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에게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습니다. 제국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한 그는 당대 최고의 거장 일리야 레핀의 눈에 띄게 됩니다. 레핀은 수많은 제자 중에서도 보리스를 유독 아꼈습니다. 그를 두고 ‘러시아 미술의 미래’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1903년, 보리스는 아카데미 수석 졸업과 함께 국제 전시회 1등 상을 거머쥐며 화려하게 데뷔합니다. 같은 해 사랑하는 여인 줄리아와 결혼하며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합니다.
바깥세상은 격변하고 있었습니다.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시작된 혁명의 불길은 러시아 전역으로 번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보리스는 괜찮았습니다. 그는 앞날이 창창한 인기 화가였으니까요.

그런데 이 무렵부터 보리스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에 시달렸습니다. 시작은 팔과 목에 느껴지는 뻐근함이었습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림을 너무 많이 그린 탓이겠지.’ 하지만 통증은 서서히 괴물로 변해갔습니다. 보리스는 일기장에 이렇게 썼습니다. “밤마다 검은 고양이가 등을 날카로운 발톱으로 쑤시고 척추를 뜯어내는 악몽에 시달렸다.” 여러 병원에 찾아갔지만, 당시 의학 수준으로는 정확한 원인을 알기 어려웠습니다.
고통으로 인해 그림을 그리기조차 어려워지자 보리스는 여러 나라의 이름난 병원을 찾아다니며 진료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간신히 알아낸 병명은 ‘척수 내 종양’. 끔찍한 통증의 원인이었던 종양을 제거하기 위해, 보리스는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술대에 오릅니다.

수술은 성공했습니다. 손을 지키고 목숨도 건졌지만, 서른여덟의 나이에 보리스의 하반신은 영원히 마비됐습니다. 하지만 비극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수술 후에도 날카로운 신경통이 계속됐기 때문입니다. 또 보리스는 상체를 고정하기 위해 가죽과 강철로 만든 무거운 코르셋을 몸에 채워야 했습니다. 살을 파고드는 이 장치는 수시로 욕창과 염증을 만들었습니다. 그 자리에서는 악취가 났습니다. 보리스는 스스로 배변을 조절할 수도, 몸을 뒤척일 수도 없었습니다. 일상이 처참하게 무너진 겁니다.
게다가 당시 러시아는 내전과 경제난으로 인해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굶어 죽어 나가던 지옥이었습니다. 수술로 인해 활동을 중단하고 병원비로 많은 돈을 날린 보리스는 배급에 의지해 간신히 끼니를 때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휠체어에 갇혀 최악의 상황을 맞은 보리스의 작품은 더욱 화려하고 생생해졌습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갈고닦은 상상력을 발휘해 시장 바닥의 질감, 상인들의 옷감 문양, 사람들의 즐거운 표정을 떠올려 그렸습니다. 1918년 그가 그린 ‘상인의 아내’가 대표적입니다. 그림 속 행복해 보이는 여성의 식탁에는 신선하고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가득합니다. 거리는 더없이 풍요롭고 아름답습니다.
보리스는 생각했습니다. 괴로운 현실은 바꿀 수 없지만, 캔버스 속 세상만큼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요. 그림 속 세상에서 보리스는 행복한 세상을 창조했습니다. 영원한 축제의 땅. 겨울에는 썰매가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은빛 설원 위를 질주하고, 봄과 여름에는 축제 행렬이 자작나무 숲을 지나는 곳. 거리에는 화려한 간판과 탐스러운 상품들이 넘쳐나고, 하늘은 언제나 아름다운 푸른색을 띠는 세상. 그곳에 몸의 끔찍한 고통, 거리의 진흙탕과 가난, 전쟁의 피비린내가 들어올 자리는 없었습니다.

현실이 어두울수록 그의 캔버스는 더욱 눈부신 색채로 빛났습니다. 좁고 어두운 방 안에서 보리스의 눈은 더욱 강렬한 원색을 찾아 헤맸습니다. 그는 러시아 민속화의 스타일을 빌려와 평면적이면서도 강렬한 색채를 사용했습니다. 그 화려한 색은 몸과 마음의 고통을 잊기 위한 진통제였습니다.


그의 작업 시간은 하루 평균 여섯 시간 정도였습니다. 오전에 주로 작업했고, 오후와 저녁에는 집으로 찾아오는 여러 친구 만나 대화하며 바깥세상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손님들 앞에서 그는 늘 유머러스하고 생기 넘치는 태도를 유지했습니다.
그의 진짜 싸움은 모두가 떠난 밤에 시작됐습니다. 침대로 옮겨져 코르셋을 벗으면, 낮 동안 억눌렸던 신경통이 칼날처럼 날카롭게 온몸을 난도질했습니다. 잠들 수 없는 밤마다 보리스는 다음 날 그릴 그림의 구도를 머릿속으로 수만 번 그렸습니다. 그가 매일 아침 휠체어에 앉자마자 거침없이 붓을 휘두를 수 있었던 건 이런 이미지 트레이닝 덕분이었습니다.
이런 속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고통과 맞서 싸우면서도 긍정적인 마음을 잃지 않는 보리스의 고귀한 정신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당대 ‘러시아 오페라의 황제’로 불리던 가수, 표도르 샬리아핀이었습니다. “저는 살면서 훌륭한 사람, 재능 있는 사람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래도 진정으로 고결한 정신을 가진 사람은 오직 보리스 한 명뿐이었습니다.” 보리스도 샬리아핀의 실력과 인품을 존경했습니다.

두 거장의 우정은 러시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초상화 중 하나인 ‘표도르 샬리아핀의 초상’을 탄생시켰습니다. 몸이 불편한 보리스가 이 작품을 완성하기까지는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캔버스의 높이는 2m가 넘었지만, 앉아 있는 보리스는 윗부분까지 손을 뻗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보리스는 천장에 도르래를 설치하고 캔버스를 비스듬히 기울여 화가 앞으로 당겨오는 장치를 고안해냈습니다. 장치 덕분에 보리스는 마치 천장화를 그리듯 누운 자세로 붓을 움직여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병과 가난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괴롭혔습니다. 보리스는 끝까지 예술로 맞서 싸웠습니다. 캔버스를 구할 수 없게 되자 그는 과거에 그렸던 그림 ‘테라스에서’의 뒷면을 뒤집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생명력을 가득 품은 작품, ‘러시아의 비너스’는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자신의 몸이 마르고 썩어가는 고통 속에서도 보리스는 삶과 인간의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그려낸 겁니다.

숨이 가빠오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그가 붙잡고 있었던 건 ‘노동과 휴식의 기쁨’이라는 벽화의 스케치. 보리스는 끝까지 자신의 고통이 아닌, 타인들이 누릴 삶의 기쁨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샬리아핀은 보리스를 이렇게 추억했습니다. “좁고 어두운 방에 갇혀 있었지만, 보리스의 영혼은 러시아의 모든 태양을 다 머금은 것 같았다.”

이런 보리스의 삶은 영화로도 잘 알려진 장 도미니크 보비의 실화 기반 책, ‘잠수종과 나비’를 떠올리게 합니다. 보비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온몸이 마비된 남자. 그가 움직일 수 있는 건 고작 왼쪽 눈의 눈꺼풀 하나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절망하지 않고, 왼쪽 눈꺼풀 하나로 신호를 보내 세상과 소통하고 책을 썼습니다. 몸이라는 감옥에서 희망이라는 나비를 날려 보낸 보비처럼, 보리스 역시 휠체어라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자신의 상상력을 저 멀리 환상의 세계로 날려 보냈습니다. 중요한 건 두 사람 모두 절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보리스는 얼마든지 짜증을 내고 현실을 비관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고통을 캔버스에 쏟아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만을 그렸고, 언제나 품위를 지키며 밝고 친절한 태도로 사람들을 대했습니다. 현실의 감옥이 아무리 나를 옥죄어도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반응할지는 오직 자신의 선택이라는 사실을, 보리스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남은 삶과 캔버스 속 세상을 축제로 만들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 용기 있는 선택은 작품이 되어 영원히 러시아인의 마음속에 남았습니다.
보리스처럼 비참한 감옥은 아니더라도, 우리는 누구나 현실이라는 제약 속에 갇혀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 현실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방식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품위와 존엄은 여기에서 나옵니다. 가장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우리의 마음은 태양을 머금은 채 자유롭게 날아오를 수 있다는 것을, 보리스는 보여줬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독자 여러분의 마음도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올 한해도 큰 사랑 보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i>**이번 기사는 Mark Etkind의 'Boris Kustodiev: Life in Creativity', Mark Etkind의 'Boris Kustodiev: Paintings, Graphic Works, Book Illustrations, Theatrical Designs', Arkady Kudrya의 'Boris Kustodiev'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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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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