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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고속철의 좌초는 실패가 아니다 [더 머니이스트-데이비드김의 블라인드 스팟]

입력 2026-01-07 06:30   수정 2026-01-07 17:55



670억달러(약 96조원).

베트남 남북을 관통하는 고속철도 사업은 숫자만으로도 국가의 야심을 상징했다. 국토를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고, 생산성과 물류 효율을 끌어올려 ‘동남아 제조 허브’를 넘어선 도약을 이루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러나 이 거대한 서사는 출범도 전에 멈춰 섰다. 2025년 12월 베트남 최대 재벌 빈그룹이 투자 제안을 전격 철회하면서다. 정치적 변수나 실행력 부족을 원인으로 지목하는 시각도 있지만, 이 사건의 본질은 훨씬 불편하다.

베트남 고속철의 좌초는 단순한 프로젝트 실패가 아니다. 이 나라 자본주의가 감당할 수 있는 재정적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보여준, 일종의 스트레스 테스트였다.

빈그룹과 타코그룹이 제시한 투자 구조는 표면적으로는 민관협력(PPP)이었다. 자기자본 20%, 나머지 80%는 정부의 무이자 또는 정부 보증 대출로 조달한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이 구조는 처음부터 지속 가능하지 않았다.

민간이 부담하는 위험은 20%에 불과한 반면, 손실의 대부분은 국가 재정으로 이전되는 설계였다. 결정적인 장면은 빈그룹 부회장의 공개 발언이다. 그는 이 사업이 “수백억달러의 손실이 예상되며, 향후 30년간 연평균 56억달러(약 8조원)의 수익으로는 운영비와 이자 상환조차 불가능하다”고 인정했다.

이 고백 하나로 모든 논쟁은 정리됐다. 이는 투자 제안이 아니라 손실 이전 계약에 가까웠다. 베트남 재무부가 국가 부채 안정성과 신용등급 하락을 경고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빈그룹의 철회는 변심이 아니라, 숫자가 요구한 가장 합리적인 결론이었다.

아시아 메가 인프라가 반복해 온 실패 공식

베트남 고속철은 예외적인 사례가 아니다. 오히려 아시아 메가 인프라 프로젝트가 반복해 온 전형적인 결말에 가깝다.

중국의 일대일로(BRI) 사업은 500억달러(약 72조원) 이상의 약속 불이행을 남겼고, 자카르타?반둥 고속철은 12억달러(약 1조7366억원)의 비용 초과를 기록했다. 태국?중국 고속철 역시 정치적 논란 끝에 자체 자금 조달로 방향을 틀었다.

이들 사례의 공통점은 기술이 아니라 금융에서 무너졌다는 점이다. 옥스퍼드대 플리브버그 교수 연구에 따르면, 대형 인프라 프로젝트 가운데 예정된 시간과 예산 내에 완료된 사례는 0.5%에 불과하다. 한 고속철 사업의 경우 투자 대비 수익률은 0.07%에 그쳤고, 승객 1달러의 티켓 수입을 위해 정부 보조금 6달러가 투입되는 구조였다.

고속철이 아니라 자본 구조가 문제다

베트남은 2030년까지 2450억달러(약 354조원), 2040년까지 6000억달러(약 867조원)의 인프라 투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공공 재정으로 충당 가능한 비율은 약 70%에 그친다. 은행권은 단기 예금 기반 구조로 인해 장기 인프라 대출이 제한되고 있고, 유료 도로 프로젝트에 대한 은행 신용은 2020년 이후 매년 감소세다.

기업 채권 시장 역시 개혁이 진행 중이지만, 낮은 신용등급과 투명성 부족, 유동성 리스크로 인해 30~40년짜리 장기 자본을 흡수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빈그룹의 철회는 이러한 구조적 한계를 상징적으로 드러낸 사건이다. 베트남 최대 재벌조차 감당할 수 없는 리스크였다면, 다른 민간 주체들도 같은 조건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환상을 접을 용기가 성장의 시작이다

고속철의 좌초는 실패라기보다 경고에 가깝다. 지금 멈추지 않았다면, 재정 악화와 신용등급 하락, 다른 인프라 투자 위축으로 이어지는 연쇄 충격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베트남에 필요한 것은 더 화려한 메가프로젝트가 아니다. 단계적 구간 개발, 수익성이 검증된 물류·도시 연결 사업, 그리고 정부 보증이 아닌 진정한 리스크 분담을 전제로 한 민간 자본 유치다. 속도가 아니라 지속가능성이 핵심이다.

670억달러(약 96조원) 고속철은 베트남 경제의 한계를 드러낸 진단 도구였다. 중진국 함정을 넘는 국가는 예외 없이 ‘하고 싶은 것’보다 ‘할 수 있는 것’을 냉정하게 구분해 왔다. 베트남의 다음 선택이 그 분기점이 될 것이다.

베트남 고속철의 좌초는 실패가 아니라 성숙의 신호다. 670억달러를 쏟아붓기 전에 멈춘 것은, 화려한 인프라 환상보다 재정 건전성을 택한 용기 있는 선택이었다. 아시아 전역에서 메가프로젝트들이 부채의 무덤이 되는 걸 목격한 지금, 베트남이 보여준 건 냉정한 자기 인식이다. 진짜 성장은 '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베트남은 지금, 중진국 함정을 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첫 시험을 통과한 셈이다.

<한경닷컴 The Moneyist> 데이비드 김 테크 저널리스트·Asia Value Creation Awards 회장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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