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은행이 엔화 약세 등에 대응해 2025년 12월 기준금리를 연 0.75%로 0.25%포인트 올렸다. 연 0.75%는 30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미국과의 금리 차이가 줄었는데 엔화 약세는 여전한 모습이다. 일본 정부가 구두 개입에 나선 가운데 엔·달러 환율이 달러당 160엔까지 오르면 엔화 매수 개입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일본은행은 2025년 12월 19일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연 0.5%인 기준금리를 연 0.75%로 인상했다. 일본은행은 1990년대 ‘거품 경제’가 붕괴하면서 1995년 9월 당시 기준금리에 해당하는 공정이율을 연 1.0%에서 연 0.5%로 낮췄다. 기준금리가 연 0.5%를 넘은 것은 그 이후 30년 만에 처음이다.
일본은행이 기준금리를 인상한 것은 2025년 1월 이후 11개월 만이다. 일본은행은 2024년 3월 17년 만에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종료했다. 2024년 7월엔 기준금리를 연 0.25%로, 2025년 1월에는 연 0.5%로 각각 올렸다. 이후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관세정책 등을 고려해 10월까지 여섯 차례 연속 기준금리를 동결했다.
10월 이후 일본은행 내에서는 트럼프 관세가 경기와 물가에 끼치는 영향이 예상보다 크지 않다는 견해가 확산했다. 자동차산업 등에 타격을 줬지만 기업 이익에 미치는 악영향은 당초 예상보다 작을 것이란 관측이 힘을 얻었다. 2025년 5%를 넘었던 임금 상승세가 올해까지 이어질 것이란 전망도 기준금리 인상에 힘을 보탰다.
최근 엔·달러 환율이 달러당 155엔을 넘나들며 엔화 약세가 이어진 것도 일본은행이 기준금리를 인상한 이유다. 엔저는 수입 물가를 올려 소비자물가 상승 요인으로 작용한다. 기준금리 인상으로 엔저에 브레이크를 걸겠다는 게 일본은행 의도다.
물가를 잡으려는 다카이치 사나에 정권도 기준금리 인상을 용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2025년 10월 소비자물가상승률은 전년 동월 대비 3.0%를 기록했다. 소비자물가상승률은 3년 7개월 연속 일본은행 목표인 2%를 웃돌고 있다.
2024년 7월 일본은행의 갑작스러운 기준금리 인상과 미국의 경기 침체 우려가 맞물리자 8월 들어 대규모 ‘엔캐리트레이드’ 청산이 이뤄졌고 이는 글로벌 시장에 ‘블랙먼데이’ 쇼크를 불렀다. 다만 이번엔 기준금리 인상이 사실상 예고된 만큼 당시 같은 혼란은 벌어지지 않았다.
일본 외환시장에서는 최근 ‘미·일 금리 차이 축소가 엔고로 이어진다’는 정설이 통하지 않고 있다. 미국의 금리인하와 일본의 금리인상으로 양국 금리 차이는 약 3년 만에 가장 작은 수준으로 좁혀졌지만 엔·달러 환율은 여전히 달러당 155엔 전후에서 움직인다.
배경에는 일본 경제의 뿌리 깊은 구조적 요인이 있다. 일본 재무성에 따르면 무역수지는 2024년까지 4년 연속 적자가 이어졌으며 2025년에도 10월까지 1조5000억 엔 적자다. 수입 대금 대부분을 달러로 지불해야 하는 점이 엔화 약세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심각한 것은 서비스수지다. 클라우드 서비스, 동영상 스트리밍 등 디지털수지는 2025년 10월까지 5조6000억 엔 적자를 기록했다. 다만 여행수지는 방일객 덕분에 5조4000억 엔 흑자를 확보했다. 앞으로는 디지털 적자가 여행 흑자를 넘어설 가능성이 높아 지속적인 엔저 압력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새로운 소액투자비과세제도(NISA)를 통한 적립 투자가 엔화 매도 요인이란 지적도 있다. 2024년 1월 신 NISA 도입 이후 해외 투자신탁 구매에 따른 자금 유출액은 월평균 6900억 엔으로 전년 동월 3800억 엔에서 크게 증가했다. 연간으로는 약 8조 엔의 엔화가 팔리는 셈이다.
다카이치 정권이 추진하는 재정 지출이 엔화에 대한 신뢰 훼손으로 작용할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적극 재정’을 내건 다카이치 정권은 올해 예산안 규모를 사상 최대인 122조 엔 수준으로 잡았다. 종전 최대인 작년 115조2000억 엔을 6%가량 웃도는 수준이다.
일본은행의 기준금리 인상에도 달러 대비 엔화값이 떨어지자 일본 정부는 또다시 구두 개입에 나섰다. 조만간 환율 개입을 단행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미무라 아쓰시 재무성 재무관은 지난 12월 22일 엔저에 대해 “한 방향으로 급격한 움직임이 보여 우려하고 있다”며 “지나친 움직임에는 적절한 대응을 취하고 싶다”고 했다.
시장에선 달러당 160엔 돌파가 ‘시간문제’라는 관측이 나온다. 2024년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은 엔·달러 환율이 달러당 160엔을 넘나들자 엔화 매수 개입을 단행했다. 이번에도 단기간에 달러당 160엔을 넘어서면 급격한 변동으로 간주해 개입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다.
엔화 매수, 달러 매도 개입은 일본의 판단만으로 마음대로 단행하기는 어렵다. 그동안 미리 미국의 이해를 얻은 뒤 실시했다. 대일 무역적자를 줄이려는 미국도 엔저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게 기본 입장이지만 개입에 무조건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인위적 시세 조작은 가능한 한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엔저의 폐해는 갈수록 늘고 있다. 일본에서 2025년 10월까지 음식점 734곳이 문을 닫았다. 역대 최다다. 역사적 엔저에 식재료 가격이 급등한 것이 가장 큰 이유다. 특히 어려운 곳이 고깃집이다. 10월까지 도산한 야키니쿠 가게는 46곳으로 역시 사상 최대다. 9월 수입 소고기 가격은 5년 만에 80%가량 뛰었다.
엔저는 국력의 근간인 인재 확보, 과학기술 발전, 국방력 강화에도 타격을 줬다. 도쿄의 IT 엔지니어 평균 연봉은 달러로 환산했을 때 미국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의 4분의 1에 불과하다. 도쿄과학대는 해외에서 들여온 슈퍼컴퓨터 리스료가 30% 급등해 운영이 어려워졌고 방위성은 스텔스 전투기 F-35A 구입 예산을 계획보다 20% 올려 잡았다.
일본은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엔고에 시달렸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10년 유럽 재정위기에 안전자산으로 각광받던 엔화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을 기점으로 정점을 찍었다. 일본에 대규모 엔 자금이 필요할 것이란 관측에 엔화값은 달러당 76엔까지 치솟았고 수출 기업은 비명을 질렀다.
오랜 기간 디플레이션에 시달리다 엔고까지 겹친 일본이 선택한 건 무제한 돈을 풀겠다는 아베 신조였다. 2012년 다시 정권을 잡은 아베는 2013년 ‘이차원(異次元·차원이 다른) 완화’를 내걸고 일본은행을 통해 ‘바주카포 머니’를 쐈다. 엔화값이 떨어지며 기업 실적이 개선됐고 닛케이지수는 상승 곡선을 그렸다.
그러나 정상 궤도에서 너무 오래 벗어난 것이 결국 화를 불렀다. 일본의 금융 완화가 길어지는 가운데 미국이 2022년 기준금리를 올리기 시작하며 미·일 금리 차이가 벌어지자 ‘슈퍼 엔저’ 시대가 열렸다. 엔화값이 달러당 150엔대까지 떨어지며 수입 물가가 폭등하자 졸지에 가난해진 일본인 사이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엔저의 주범은 0%대로 추락한 일본 잠재성장률이다. 엔고 때 해외로 탈출한 일본 기업은 현지에서 벌어들인 달러를 엔으로 바꿔 일본으로 들여오는 대신 현지에 재투자한다. 일본의 낮은 노동생산성이 기업의 유턴을 망설이게 하고 있다.
일본은 늦게나마 주범 잡기에 나섰다. 다카이치 총리는 2025년 10월 취임 직후 근로시간 규제를 완화하는 방안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올해 세제 개편안엔 업종을 막론하고 설비투자 때 투자액의 7%를 법인세에서 깎아주는 방안을 담았다.
도쿄=김일규 한국경제 특파원 black041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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