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년 가까이 한국영화의 곁을 지켰던 ‘스크린의 거목’이 나직한 작별을 고했다. 화려한 스타 이전에 국민 배우로 오랜 세월 사랑받았던 안성기씨가 5일 별세했다. 향년 74세.
한국영화배우협회에 따르면 안성기는 이날 오전 9시께 서울 한남동 순천향대병원 중환자실에서 치료받던 중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지난달 30일 자택에서 음식물이 목에 걸린 채 쓰러져 중환자실에 입원한 지 6일 만이다.
1957년 데뷔한 ‘韓영화 산증인’
1952년 대구에서 태어난 고인은 1950년대 본격적으로 막을 올린 한국 영화의 부흥기를 함께한 배우로 기억된다. 국내에서 가장 긴 현역 배우 경력을 가진 배우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고인의 삶이 영화산업의 부침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일찍이 ‘한국영화의 페르소나’라는 별명이 붙었다. 만 5세였던 1957년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로 데뷔해 윗세대 배우인 고(故) 이순재(1934~2025)와도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오랜 세월 현장을 지켰기 때문이다. ‘황혼열차’는 지난달 별세한 ‘한국의 리즈 테일러’ 김지미(1940~2025)의 스크린 데뷔작이기도 하다.
고인은 8살의 나이에 김기영 감독의 ‘10대의 반항’에 출연해 샌프란시스코 국제영화제 소년 특별연기상을 수상하는 등 아역 배우로 70여 편의 작품에 출연하며 두각을 드러냈다. 훗날 연기 인생을 회고하던 자리에서 고인은 “연기가 뭔지도 몰랐고, 시키는 대로 했다”고 자신을 낮췄지만, 당시 신문과 방송에서 ‘천재소년 안성기’라 부를 정도로 영화계 안팎이 인정하는 아역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1950~1960년대 한국영화의 첫 황금기 당시 영화가 제작되기만 하면 ‘어린 안성기’가 있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다작배우로 사랑받았다.

고인은 아역배우로 보장된 생활을 뒤로 하고 성년을 맞이하며 연기와 잠시 거리를 뒀다. 고등학교에 들어가 학업에 매진한 그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베트남전에 참전하기 위해 한국외대 베트남어과에 입학했다. 한발 앞서 전쟁이 종식된 탓에 참전하진 못했지만, 학군단(ROTC) 출신 육군 중위로 군 복무를 마쳤고 또래 친구, 동료들처럼 일반 기업 취업 준비도 하며 사회생활을 했다. 스크린에서 벗어나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던 이때를 고인은 “인간적으로 성장했던 시기”로 떠올렸다.
“하얀 도화지 같다”…국민배우 반열에
고인은 10년간의 바깥 생활을 마치고 다시 카메라 앞에 섰다. ‘병사와 아가씨들’(1977)로 충무로에 복귀한 후 이장호 감독의 ‘바람 불어 좋은 날’(1980)로 대종상 신인상을 받으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아역배우가 성인 배우로 성공하기 힘들 것이란 세간의 우려를 씻어낸 데엔 휴식기 동안 사회에서 부딪히며 소시민의 감정을 직접 체득한 세월이 밑바탕이 됐다. 이후 그는 ‘꼬방동네 사람들’(1982) 같은 시대적 고민을 담은 작품, ‘기쁜 우리 젊은 날’(1989) 같은 멜로, 방황하는 청춘을 그린 ‘고래사냥’ 등 다양한 캐릭터를 거침없이 소화하는 베테랑 연기자가 됐다. 고인과 오래 함께 작업한 배창호 감독은 훗날 “하얀 도화지처럼 여러 색깔을 입힐 수 있는 배우”라고 평가했다.
1990년대 접어들어 고인은 대중성과 작품성을 겸비한 국민 배우 반열에 올랐다. ‘남부군’(1990) 같은 작품에서 처절한 연기로 전쟁과 이데올로기의 비극을 그려내는가 하면, 평생의 단짝 박중훈과 호흡을 맞춰 비리경찰을 연기한 ‘투캅스’(1993)에선 능청스러운 코믹 연기를 선보였다. 장르를 가리지 않는 고인의 연기 스펙트럼은 이 시기 산업적으로 팽창하던 한국영화를 지탱한 버팀목이었다.
2003년 고인이 출연한 영화 ‘실미도’는 한국 영화 첫 1000만 관객 시대를 연 기념비적 작품으로 꼽힌다. 이후 ‘라디오스타’(2006)에서 한 물 간 스타를 옆에서 돕는 매니저를 연기하며 영화에 깊이를 더했다. 2010년대, 그리고 최근까지도 ‘부러진 화살’(2012) ‘화장’(2014) ‘한산: 용의 출현’(2022) 등 쉬지 않고 현장을 지켰다. 고인은 한국영상자료원이 지난해 영화인 투표로 선정한 ‘한국영화 100선’에서 송강호와 함께 가장 많은 작품에 출연한 배우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엄격한 자기관리, 이웃사랑 실천까지
긴 세월 고인이 독보적인 배우로 사랑받은 것은 스스로에게 늘 엄격하게 다스려왔던 철저한 자기관리 덕분이었다. 생전 고인은 “영화하는 사람들, 영화 자체가 좋은 인식을 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다그치고 자제하며 살았다”며 직업윤리를 밝혔다. 언제나 연기로 대중과 만나기 위해, 배우의 길을 뒤따르는 후배들의 꿈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는 뜻이다.
고인의 이런 책임감은 자기 자신을 넘어 영화계 전체로 향했다. 한국 영화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가장 먼저 거리로 나서 목소리를 높였다. 1990년대 후반 스크린쿼터 축소 움직임이 커지자 고인은 삭발까지 감행하며 스크린쿼터 사수 운동의 선봉에 섰다. 1992년부터 20년 넘게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활동하며 소외된 곳에 시선을 뒀다.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장,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집행위원장 등을 맡으며 영화시장 성장에도 힘을 쏟았다. 영화예술 발전의 공로를 인정 받아 지난해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에 입회했다.
고인은 2019년 혈액암 진단을 받은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대중의 안타까움을 샀다. 적극적인 치료로 이듬해 완치 판정을 받았지만, 추적 관찰 과정에서 암이 재발해 최근까지 투병 생활을 이어왔다. 항암 치료로 가발을 쓰고 부은 얼굴로 공식 석상에 서면서도 고인은 늘 특유의 환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병마의 위기 속에서도 “제가 받은 사랑에 대한 보답”이라며 서울성모병원에 1억 원을 기부하는 등 이웃을돌보는 데 힘썼다.
유족은 아내 오소영씨, 아들 안다빈·필립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 반포동 서울성모병원에 마련된다.
유승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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