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초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은 영국의 앨런튜링연구소(ATI)에서 메일 하나를 받았다. 공동 연구와 정책 네트워크 구축에 동참하겠다는 내용이었다. STEPI 연구원들은 앨런튜링연구소 연구원들과의 몇 차례 회의 과정에서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대영제국으로 불렸으며, 현재 미국이 유럽의 최상위 파트너로 삼고 있는 영국이 스스로를 ‘미들파워’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국 정부가 2015년 국가 차원의 인공지능(AI) 정책·연구를 위해 수립한 앨런튜링연구소는 한국의 STEPI와 ‘피지컬 AI 연구동맹’을 맺었다. 한·영을 대표하는 두 과학기술혁신 분야 싱크탱크는 약 1억 건의 글로벌 논문과 특허 데이터를 분석하는 공동 연구를 통해 로보틱스, 센서, 제어, 온디바이스 AI, 뉴로모픽 반도체 등 협력할 수 있는 세부기술 묶음 5개를 도출했다.

앨런튜링연구소의 제안은 영국의 고민과 한국의 달라진 위상을 동시에 보여주는 사례다. 영국은 AI와 관련한 기초과학의 뿌리다. ATI가 이름을 빌린 앨런 튜링은 현대 컴퓨터과학과 AI의 아버지로 불리는 학자다. 딥마인드 창업자인 데미스 허사비스도 영국 케임브리지대를 졸업했다. 아울러 영국은 2012년 합성생물학을 국가 차원에서 전략 기술로 채택한 최초의 국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국은 제조업 붕괴라는 고민에 직면해 있다. 실험실에서의 연구를 산업화할 역량이 현저히 떨어졌다. 최종화 STEPI 연구원은 “기초과학의 성과를 시장에 내놓기 위해 영국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관련 분야 스타트업을 육성하는 것뿐”이라며 “미국과 중국의 빅테크들이 AI 등에서 독점을 가속화하는 터라 속도를 높이기 위한 다른 대안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영국의 움직임은 미·중의 완전한 절연에 대한 대응책으로 풀이된다. 미·중의 부상에 고민이 깊은 것은 일본도 마찬가지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올해 국제 정세의 화두로 “중국의 경제적 압박을 피하기 위해 중국에 대한 내성을 확보해야 하고, 동시에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불확실성에 대비하는 ‘내미(耐米)’가 한층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호주 역시 국가 과학기술 정책의 컨트롤타워인 연방수석과학자가 최근 한국에 양자·바이오 분야 협력을 제안했다. STEPI 관계자는 “호주는 최근 바이오 AI 분야에서 유망 스타트업을 여럿 배출했는데 대부분이 미국으로 흡수된다는 위기의식을 갖기 시작했다”며 “바이오 파운드리 분야가 강한 한국과 스타트업 단계부터 협업하면 이 같은 현상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지난해 11월 20일엔 유럽연합(EU)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가입 12개국 장관이 처음으로 호주 멜버른에서 만났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이를 “세계 경제의 약 30%를 차지하는 두 자유무역지대가 ‘미국 배제’ 질서를 모색하는 움직임”이라고 평가했다.
제3세계의 맹주로 불리는 인도가 한국과의 접점을 넓히려고 하는 것은 한국이 미들파워들을 연결하는 ‘가교 국가(bridge state)’로 도약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지난해 11월 서울대는 주한 인도대사관과 공동으로 ‘한·인도 전략적 대화 심포지엄’을 열었다. 서울대 관계자는 “AI·양자·디펜스테크 등 인도 측에서 몇 가지 협력 분야를 콕 집어 2026년에도 인도에서 고위급 행사를 열자고 재촉할 정도”라고 말했다. “한국과 기존 투자 파트너십을 넘어 공급망 회복력과 AI 기술 표준을 함께 만드는 ‘전략적 동맹’을 원한다”는 것이 인도 측 제안이다.
미들파워 연결이 무조건적 협력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STEPI는 일본과의 협력과 관련해 ‘전략적 선택’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양자기술에서 기초 이론과 표준 정립에서는 협력하되, 핵심 소자와 군사적 활용 영역에선 경쟁 혹은 거리두기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대만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발사체와 지상 시스템, 대만은 위성 부품과 정밀 전자·반도체에 강점이 있으므로 양국이 위성 개발-발사-운영-데이터 활용으로 이어지는 완결형 가치사슬에서 분업 구조를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이 STEPI의 결론이다. 이와 관련해 호주 로위연구소는 “현대 미들파워의 실질적 힘은 ‘네트워크 설계 능력’에서 나온다”고 강조했다. 한국이 제조업 분야 미들파워의 허브로 기능하기 위해선 누구와 손잡고 누구와 경쟁할지를 정밀하게 설계하는 능력이 필수라는 지적이다.
김대훈/이영애 기자
공동 기획 : 한경·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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