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기술 경쟁과 지정학적 위기가 겹치는 시대에 유럽 특히 네덜란드는 ‘더 빠른 기술’이 아니라 ‘흔들려도 무너지지 않는 기술’을 설계해 왔다. 필자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연구 생활을 하다가 네덜란드 델프트공대로 옮기며 두 지역의 기술관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체감했다. 미국에서 기술은 혁신과 성장, 경쟁 우위를 위한 수단으로 인식되는 데 비해 네덜란드와 유럽에서 기술은 위기에서도 사회 시스템을 유지·조정하는 공공적 장치로 다뤄진다.유럽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이 기술은 얼마나 빠른가’가 아니라 ‘큰 충격에서도 사회가 중심을 잃지 않고 작동할 수 있는가’다. 필자는 이를 ‘역동적 안정성’이라고 부른다. 이는 변화를 억제하는 복원력이 아니라 위기에서도 기존 자원과 역량의 용도를 재정의해 새로운 안정 상태로 전환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여객 수요가 90% 급감했음에도 KLM 등 유럽 항공사들이 여객 공간을 화물 운송으로 전환해 물류 수요를 흡수한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 중요한 점은 이런 대응이 기업의 즉흥적 판단이 아니라 평소 제도와 설계 차원에서 전환 가능성을 축적한 결과라는 점이다.
유럽연합(EU) 차원의 연구·혁신 정책 역시 같은 방향을 지향한다. ‘호라이즌 유럽’은 기술 성과뿐 아니라 사회적 파급효과와 시스템 안정성을 핵심 평가 기준으로 삼는다. 기술 연구에도 인문·사회과학 협업을 요구하는 점은 속도와 시장 지배를 중시하는 미국식 연구 모델과 대비된다.
이런 접근은 네덜란드가 미·중 사이에서 미들파워로서 입지를 유지하는 전략과 맞닿아 있다. 미·중 공급망이 반드시 필요로 하는 병목 기술을 확보하되, 기술을 사회 전체의 안정성과 연결함으로써 외부 충격에 덜 흔들리는 국가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느리지만 쉽게 사장되지 않는 기술 그리고 제도와 함께 축적되는 혁신 역량이 네덜란드의 경쟁력이다.
지금까지 한국은 빠른 상용화와 단기 성과에 강점을 보였지만, 위기 상황에서의 전환 여지와 사회 시스템의 안정성에 대한 고민은 상대적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기술 경쟁이 격화할수록 중요한 질문은 ‘얼마나 앞서 있는가’가 아니라 ‘격변 속에서도 다시 균형을 찾을 수 있는가’일 것이다. 유럽 그리고 네덜란드가 보여주는 ‘역동적 안정성’은 한국이 다음 단계의 기술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의미 있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김의영 델프트 공대 산업디자인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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