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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일훈 칼럼] 청년과 기업을 위한 나라여야 한다

입력 2025-12-31 16:33   수정 2026-01-01 00:24

모든 것이 한결같은, 정상(定常) 상태라는 것은 없다. 항구적 경계라는 것도 없다. 종전을 앞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면 안다. 침략을 당한 우크라이나는 수많은 젊은 목숨의 희생에도 영토의 상당 지역을 내줘야 할 판이다. 그러고도 안전과 평화에 대한 보장은 요원하다. 한국에서 약 7700㎞ 거리의 우크라이나 국경 파괴는 전 세계적인 군비 확장과 북·러 군사동맹이라는 엄청난 나비효과를 불러왔다. 조선·방산 특수라는 망외의 효과를 보고 있지만 한국의 안보 지형도 급변했다. 핵을 거머쥔 김정은은 러시아라는 강력한 후원자를 확보하면서 한반도 신냉전 구상을 더욱 노골화하고 있다.

판이 흔들리고 기존 질서가 해체되면 기회와 위기가 동시에 분출된다. 우리는 지난해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폭주에 꽤나 시달렸다. 이재명 대통령이 ‘약소국 설움’ 운운할 정도로 미국은 고압적이고 일방적이었다. 이제 엄청난 돈과 일자리가 미국으로 옮겨갈 판이다. 대미 투자 역시 양날의 칼이다. 실패 위험을 고스란히 안는 대신에 미국의 첨단기술을 우리 산업에 접목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미·중 사이 샌드위치 운명
미국이 한국 일본 같은 우방을 상대로 실리를 챙기는 동안에도 중국의 패권 시계는 빠르게 돌아갔다. 아직 미국을 정면으로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지만 중국은 별로 약점이 없는 나라다. 노동-기술집약적 산업을 동시에 영위하면서도 거대 창업국가의 기업가정신이 들끓는다. 반도체를 제외한 모든 업종에서 한국과의 기술 격차를 역전시키고 있다. 중국의 한국 추월은 ‘예정된 미래’가 아니라 ‘완료된 현실’이다. 새로운 판을 짜지 못하고 도망가기에 급급하면 종래는 무역-산업 약소국으로 전락하는 재앙이 들이닥칠 것이다. 20여 년 전 이건희 삼성 회장은 “한국은 일본과 중국 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세”라고 위기감을 토로했다. 지금 와서 보니 일본이 아니라 세계 최강국인 미국과 중국 사이에 정확하게 끼어버렸다.

중국은 대륙 국가이면서도 해양 패권을 노린다. 미국은 갈수록 중국을 다루는 데 애를 먹고 있다. 남중국해 지배권을 노리는 중국은 대만 복속을 포기할 수 없다. 미국의 억지력이 조금이라도 약해지면 바로 행동을 개시할 것이다. 미국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약 3900㎞ 거리의 하와이 주둔 함대, 9400㎞ 떨어진 괌 군사기지를 통해 태평양과 동아시아 전략을 펼쳐 왔다. 하지만 하와이에서 8000㎞나 떨어진 대만을 보호하기엔 점증하는 중국의 해양 능력이 부담스러운 상황이다. 주한미군과 주일미군 역할에 대만 방어를 추가하려는 이유도 이런 사정에서다. 일본은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우리는 중국을 자극할까 봐 미온적이다. 미국이 한국의 내부 사정을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북핵에 맞서야 하는 우리로서는 이대로 대만 문제를 외면하기가 영 개운치 않다.
칸트의 '전 지구적 긴밀성'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는 동북아의 세력 균형은 어떤 방향으로든 변화가 불가피하다. 미국은 현상 유지를 원하고 중국은 현상 타파를 노린다. 경계가 무너지고 균형이 깨지는 날이 우리에게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특별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느낀다. 연년세세 새롭지 않은 과제와 도전이 없지 않지만, 한 해를 시작하는 오늘이 대단한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앞날을 준비하는 현세대의 고심이 그만큼 크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은 비좁아 터진 나라다. 국민의 능력이나 산업 규모에 비해 우리 영토와 시장은 상대적으로 너무 작다. 세계로 나아가지 않으면 청년 일자리를 만들 수 없고 달러를 벌어들일 수도 없다. 국가적 응집력과 정치적 안정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18세기 포화와 전란에 휩싸인 유럽대륙을 보면서 <영구평화론>을 집필한 이마누엘 칸트는 이렇게 썼다. “전 지구적 차원의 긴밀성은 한 국가 내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투쟁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다.” 지구적 긴밀성이라고 한다면 200년 전 유럽이 지금 세계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급변하는 세계 정세에 눈을 감고 한 줌의 권력이나 이권을 위해 우리끼리 계속 지지고 볶는다면 외세가 아니라 내부에서 먼저 무너질지도 모른다. 세상 돌아가는 사정 뻔히 아는 기업과 국민은 천지사방으로 흩어져나갈 것이다.

돌이켜보면 작금의 고환율 사태도 새로운 것이 아니다. 2024년 말 원·달러 환율도 1472원으로 마감했다. 지난해 말보다 30원 이상 높았다. 막판에 외환당국의 적극 개입이 없었더라면 1500원 선을 뚫었을 수도 있지만 환율에 대한 걱정이 돌출적으로 확산된 것은 사실이다. 사람들은 문득 현 수준 환율이 ‘뉴노멀’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 경제의 기초 체력이 왜 이렇게 허약하냐는 탄식을 쏟아냈다. 먼바다의 쓰나미가 해안에 밀려들고서야 야단법석을 떠는 꼴이다. 현상과 인식의 갭이 이렇게 멀고도 크다는 점에 새삼 놀라게 된다. 와중(渦中)이라는 말은 소용돌이에 갇혔다는 뜻이다. 어떤 일의 와중에 있는 동안은 그 끝을 가늠하거나 짐작하기가 어렵다. 우리가 딛고 있는 안보·경제·산업 지형도 그렇다. 미·중 패권의 향배나 중국의 대만 압박, 글로벌 공급망 재편 같은 일도 한창 소용돌이치는 중이다.
AI 시대 韓 제조업에 큰 기회
결론은 외적 변화에 맞설 수 있는 내적 역량 확보와 내부 통합이다. 경영 불확실성이 최고조에 이를 때 기업들이 선택하는 전략이 있다. 바로 인재와 기술 확보다. 국가도 생존을 위한 기본 전략이 있어야 한다. 청년과 기업이다. 청년은 모든 국가의 미래다. 비록 인구구조 변화로 숫자가 줄고 있지만 앞으로 우리 사회가 키워야 할 유일한 인적 자산이다. 머릿수로 승부하는 시대가 아니고 노동력으로 가치를 만드는 세상도 아니다. 교육과 대학 개혁을 통해 능력과 자질을 더욱 예리하게 벼리고 정교하게 가다듬으면 미래 생존 전쟁에서 두려울 것이 없다. 무작정 청년들을 창업 대열로 떠밀어서는 안 된다. 한국은 모든 업종이 공급과잉이다. 창업 성공 확률은 기대보다 높지 않다.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것이 우선이다. 재정 일자리가 아니라 민간의 활력이 만들어내는 일자리여야 한다. 창업 지원도 선별적이어야 한다. 내수가 아니라 세계적인 것, 플랫폼이 아니라 기술 선도적인 것, 레드오션이 아니라 블루오션을 개척하는 창업에 한정된 재원을 몰아줘야 한다.

청년을 최우선 순위에 놓으면 기업 정책이 자동으로 생성된다. 투자 활력을 높이고 생산 유통 전 부문에 걸쳐 경제적 자유를 최대치로 허용해야 한다. 기업은 파괴와 창조의 주역이다. 세상의 변화를 가장 먼저,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첨병적 자산이다. 마침 인공지능(AI) 시대가 도래했다. 산업 간 경계 파괴와 융합, 연결과 확장이라는 창조적 에너지가 분출하고 있다. 전자 반도체 자동차 로봇 정보통신 산업 간 경계가 무너지자 하늘을 나는 자동차가 개발되고 휴머노이드 로봇이 춤을 추기 시작한다. 가까운 장래에 골동품이나 예술작품을 제외한 모든 제품에 AI가 장착될 것이다. 전 세계 제조업은 AI를 발판으로 화려한 중흥기를 맞이할 것이다. 제조업 비중이 높은 한국에는 엄청난 기회이자 위기다. 최고의 제품을 원하는 소비자는 당연히 최고의 AI를 고집할 것이다. 자율주행차를 구입하는 사람들은 스타일이나 디자인이 아니라 자율주행 소프트웨어의 완벽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할 수밖에 없다. 목숨이 걸린 안전성 앞에서 가성비 전략은 설 자리가 없다. 오픈AI나 구글의 거대 AI나 자동차 로봇 우주를 아우르는 테슬라의 거대 연구 조직은 없지만 만드는 기술 하나만큼은 특출한 한국이다. 겁주고 옥죄고 뒷다리 잡는 풍토만 사라지면 최종 승자가 되고도 남을 기업들이다. 붉은 말의 해, 병오(丙午)년 새해가 밝았다. 지축을 흔들며 질주하는 적토마처럼 청년과 기업들이 거침없이 내달리는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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