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의 ‘햄릿’과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로 두 가지 인간형을 대조하는 것은 전통이 깊다. 1860년 러시아 작가 투르게네프의 <햄릿과 돈키호테>라는 비평적 에세이가 그 시초다.의심이 많은 햄릿은 자기 안으로 침잠하고, 이 ‘생각의 과잉’은 결정력 장애로 이어져 비극을 부른다. 반면 확신에 불타는 돈키호테는 행동이 주저없어 자신의 바깥 세계로 돌진하고, 이 무모함이 현실의 벽 앞에서 좌절돼 허무에 이른다.
투르게네프는 장점만큼 단점이 분명한 이 두 캐릭터 중 그래도 돈키호테에게 긍정적 비중을 둔다. 여기에는 당시 러시아가 처한 사회적 상황이 주요했다. 농노제 폐지 임박, 구세대와 신세대의 극심한 이념 갈등 등 격변기에 처한 러시아에서 투르게네프는 특히 지식인들이 햄릿의 사변적(思辨的) 광대짓만을 반복하느라 실천 없는 비판과 책임지지 않는 지성, 희생 없는 자기연민과 나태에 빠져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런 러시아 지식인들의 성향을 ‘햄릿주의(Hamletism)’로 규정했다. 비록 비현실적인 돈키호테의 계획들은 전부 실패했지만, 그 신념 어린 열정과 헌신에 보다 더 높은 시대적 가치를 부여한 까닭이다.
투르게네프의 이 지적이 오늘의 한국 사회에 불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보다는 이 새해의 벽두,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사색해보는 것도 유익하지 않을까 싶다. <햄릿>과 <돈키호테>의 주인공을 서로 바꿔서 대입해보는 것이다. 그러면 각각의 이야기는 어떻게 달라질까?
만약 <햄릿>의 주인공이 돈키호테라면 이야기의 러닝타임은 줄어든다. 아버지의 유령이 나타나 “복수하라”고 말하는 순간 돈키호테는 의심하지 않는다. 유령의 진실성이나 환각의 여부, 정치적 함의를 묻지 않는다. 클로디어스는 더 이상 조사가 필요한 범죄 용의자가 아닌 진짜 범인이다. 돈키호테는 덴마크 궁정(宮廷)의 음모를 파헤치지 않고, 연극 공연을 통한 검증도 하지 않는다. 그는 공개 석상에서 정의를 외치며 숙부인 왕 클로디어스를 규탄하거나 결투를 신청할 것이다.
하여 스토리는 1막에서 완전 종결될 수도 있다. 왕이 즉각 제거되거나, 반대로 돈키호테가 미치광이로 체포돼 처형된다. 오필리아는 숙고 끝에 버려지는 게 아니라 순결한 연모의 대상이 된다. 오필리아의 죽음은 그녀가 용에게 납치당했거나 마법에 걸렸다는 식으로 착각돼 돈키호테가 새 모험을 떠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 역시 현실의 정치 폭력 속에서 파괴된다. 이 버전의 <햄릿>은 비극이 아니라 희극적 비극이 되고, 사유의 연극이 아니라 확신의 폭주극이 된다. 진실은 빠르게 선언되지만, 정의는 끝내 제도화되지 않는다.
반대로 <돈키호테>의 주인공이 햄릿이라면 어떨까. 그는 풍차 앞에서 이것이 거인인지, 거인으로 보이게 만든 사회적 착각인지를 분석한다. 혹은 그것이 단순한 풍차인지, 누군가 자신을 속이기 위해 풍차로 위장한 고도의 정치적 함정인지를 의심하느라 공격하지 못한다. “돌릴 것인가, 멈출 것인가(To turn, or not to turn)”를 고민하다 해가 저물 수 있다. 햄릿은 기사도 소설을 읽고도 그걸 현실로 착각하지 않으며 대신 “이 세계는 정말 타락했는가?”에 대해 저 혼자 논쟁한다.
산초 판사는 충복이 아니라 현실을 자각하게 하는 냉소적 대화 상대가 된다. 여관 주인은 사기꾼이 아니라 계급과 욕망의 축소판으로 해석된다. 여기서 햄릿은 싸우는 대신 관찰하고 기록한다. 결과적으로 이 이야기는 모험담이 아니라 끝없는 자기성찰의 여행기, 행동하지 않는 비평서가 된다. 햄릿은 풍차가 왜 거인으로 오인되었는지를 설명하다가 길 위에서 늙어간다. 이 버전의 <돈키호테>는 웃음을 주지 않고, 세계를 바꾸지도 못한다. 모든 착각의 구조를 해부한 뒤, 그대로 둔다.
이렇듯 ‘주인공’이 바뀌면 스토리는 본질적으로 변한다. 환경이나 다른 등장인물들이 바뀌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한 인간 안에는 햄릿과 돈키호테 말고도 수만 가지 모습들이 들어 있다. 무엇으로 살든 간에, 우리 각자가 제 삶의 주인공이라는 사실 자체를 망각하거나 부정해서는 안 된다. 대중파시즘의 시대, 이 사회에는 자신의 주인공 자리를 타락한 정치인에게 헌납한 노예들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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