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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P&A는 왜 CFO의 언어가 되었는가 [이장환 박사의 FP&A 인사이트]

입력 2026-01-07 10:29  

이 기사는 01월 07일 10:29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임원회의는 늘 숫자의 전쟁터이다. 몇 해 전, 국내 굴지의 대기업 CEO가 주재한 전략 회의도 마찬가지였다. 회의실 테이블 위에는 각 사업부와 재무팀이 지난 2주간 밤을 새워 준비한 두툼한 보고서들이 쌓여 있었다. 스크린에는 수백 개의 숫자가 쉴 새 없이 흘러갔다. 매출, 영업이익, 비용 구조, 전년 대비 증감률…. 데이터는 방대했고, 분석은 치밀했다. 하지만 발표가 끝나고 이어진 CEO의 한마디는 회의실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보고서는 완벽합니다. 그런데 이 많은 숫자들 중에서 우리가 ‘지금 당장’ 내려야 할 결정은 무엇입니까? 보고서는 이렇게나 많이 만드는데, 왜 우리의 의사결정은 늘 제자리입니까?”

이 장면은 비단 이 기업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날 많은 한국 기업의 경영진이 뼈아프게 공감하는 대목이다. ERP(전사적자원관리)의 도입과 디지털 전환으로 기업이 보유한 데이터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숫자가 쌓일수록 방향은 보이지 않고, 보고의 양은 늘어나는데 정작 판단의 속도는 더뎌지는 현상이 벌어진다. 이른바 ‘분석의 마비(Analysis Paralysis)’다.

이유는 단순하다. 기업들이 숫자를 과거를 정리하는 ‘기록의 언어’로만 대하고, 미래를 결정하는 ‘의사결정의 언어’로 해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회계가 “작년에 이익이 얼마 났다”는 사실(Fact)을 검증하는 거울이라면, 경영에 필요한 것은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리키는 나침반이다. 바로 이 간극을 메우는 핵심 기능이 FP&A(Financial Planning & Analysis)다.

FP&A는 흔히 ‘재무기획’ 정도로 번역되지만, 글로벌 선진 기업에서 통용되는 의미는 훨씬 입체적이다. FP&A는 예산, 실적, KPI, 시장 데이터를 종합하여 전략 실행을 지원하는 경영의 ‘분석 엔진’이자 ‘운영 체계(OS)’다. 아마존, 구글, 유니레버 등 글로벌 기업들이 FP&A를 단순한 재무팀의 일개 기능이 아닌 핵심 경영 시스템으로 격상시킨 이유는 명확하다.

첫째, ‘예측(Prediction)’보다 ‘대응(Response)’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고금리, 전쟁, 공급망 위기 등 지정학적 리스크와 거시경제의 불확실성이 상수가 된 환경에서 단순한 실적 예측은 빗나가기 일쑤다. 이제 경영진에게 필요한 건 “내년 환율이 얼마인가?”에 대한 정답이 아니다. “환율이 10% 오르면 우리 이익은 얼마나 깨지는가, 그리고 우리는 가격 인상과 원가 절감 중 어떤 카드를 써야 하는가?”에 대한 시나리오다. FP&A는 다양한 가정(Assumption) 기반의 시나리오 분석을 통해 막연한 불확실성을 ‘관리 가능한 선택지’로 전환해 준다. 이것이 기업의 회복탄력성(Resilience)을 결정한다.

둘째, 부서 간 KPI의 충돌을 ‘기업가치’라는 기준으로 정렬해야 하기 때문이다.
흔한 회의 풍경을 떠올려보자. 영업본부는 매출 목표 달성을 위해 무리한 밀어내기를 하거나 재고를 쌓아달라고 아우성친다. 반면 재무팀은 현금 흐름 방어를 위해 재고를 줄이고 비용을 삭감하라고 압박한다. 각 부서는 각자의 KPI 달성을 위해 최선을 다해 뛰지만, 정작 회사의 전체 이익은 훼손되는 ‘부분 최적화의 함정’에 빠진다.

이때 FP&A는 통역사이자 조율자가 된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부서들의 목표를 ‘기업가치 창출(Value Creation)’이라는 하나의 축으로 재정렬한다. 단순히 예산을 깎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지출이 미래 가치를 만드는 투자인지를 구분해 자원을 배분한다. 이는 단순한 조율이 아니라 전사의 실행력을 한 방향으로 모으는 핵심 메커니즘이다.

셋째, 의사결정의 속도가 곧 경쟁력인 까닭이다.
한국 기업 특유의 성실한 ‘월 마감’ 문화는 역설적으로 의사결정을 지체시킨다. 월 단위로 실적을 확정하고, 보고서를 꾸미고, 회의를 소집해 지시를 내리는 ‘실적 정리-보고-지시’의 낡은 사이클로는 초(秒) 단위로 변하는 시장 변화를 따라잡을 수 없다.

데이터에 기반해 실시간(Real-time)으로 성과를 모니터링하고, 분기가 지나지 않았더라도 즉각적으로 예산을 수정하고 자원을 재배치하는 유연함이 필요하다. FP&A는 형식을 위한 비효율적 보고 문화를 해체하고, 데이터 기반의 고속 의사결정을 가능케 하는 인프라다.

따라서 CFO(최고재무책임자)의 역할도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과거의 CFO가 숫자의 정확성을 검증하고 회사의 곳간을 지키는 깐깐한 ‘문지기(Gatekeeper)’였다면, 미래의 CFO는 전략을 설계하는 ‘해석가’이자 의사결정의 흐름을 주도하는 ‘비즈니스 파트너’여야 한다. 숫자를 쥐고 흔드는 권력이 아니라, 숫자로 길을 보여주는 통찰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앞으로 연재할 칼럼을 통해 필자는 한국 기업에 FP&A라는 새로운 경영 프레임을 제안하고자 한다. 1년 내내 책상 서랍 속에 잠자고 있는 예산이 어떻게 살아있는 전략 실행 시스템이 될 수 있는지, 벽에 걸린 장식품이 된 KPI가 어떻게 조직을 움직이는 지도가 될 수 있는지 생생하게 보여줄 것이다. 또한, 한국 기업의 고질적인 ‘보고 문화’를 어떻게 ‘결정 중심의 문화’로 바꿀 수 있을지 실무와 전략의 관점에서 구체적인 해법을 풀어내려 한다.

변화는 생각의 전환에서 시작된다. 기업의 숫자는 단순히 과거를 기록한 영수증이 아니다. 그것은 미래를 결정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이제 그 무기를 제대로 휘두르는 법, FP&A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그 첫걸음으로 다음 칼럼에서는 왜 우리가 매년 그토록 공들여 짠 예산이 현장에서는 무용지물이 되는지, 그리고 책상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는 ‘예산’을 어떻게 기업의 심장을 뛰게 하는 ‘전략 실행 시스템’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을지 살펴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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