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공허(空虛)는 죽지 않아. 빅뱅 이전에 있었으니까…(중략)…빅뱅 이전에 존재했던, 빛도 물질도 아닌 이 보이드(void), 공허의 공간이 바로 신의 영역이라네. 거기에 빛이 들어가 창조가 되는 거지”
“천국은 물질과 마인드가 있었던 기억과 그것을 담을 수 있게 했던 보이드 그 자체. 기독교에서는 천국이라고 하고 소크라테스는 이데아라고…(하략)”</i>
다양한 분야에 걸쳐 위대한 문장을 남긴 이어령 선생의 떠나기 직전 말씀을 엮은 책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는 ‘공허’와 ‘보이드’에 관한 문장이 나옵니다. 선생은 ‘공허’를 두고 영원불멸(永遠不滅)하다고 말했는데, 도시의 보이드를 거닐거나 악보의 빈 공간을 보며 다시 한번 ‘보이드’를 떠올렸습니다.

마음을 채워주는 종묘
고층 건물로 가득한 서울의 주요 업무지구에는 다행히도 숨 쉴 여지를 주는 커다란 녹지가 존재합니다. 바로 종묘를 비롯해 옛 궁궐, 왕릉과 이를 둘러싼 넓은 필지인데요. 가끔 시내에서 약속이 있는 날이면 잠시라도 짬을 내어 나무로 가득한 이 매력적인 보이드에 머물 때가 있습니다. 종묘의 정문인 창엽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 신로(신의 길, 神路)를 따라 걷다 보면 마치 다른 세계로 이동한 듯한 기분이 듭니다.
한 폭의 사진에 담기 힘든 규모의 종묘 정전과 월대(月臺), 박수근 화백의 작품처럼 거칠고 투박한 박석은 그 자체로 분위기를 압도합니다. 역대 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시느라 옆으로 길게 뻗게 된 사당 건축 종묘의 백미는 정전 앞에 유난히 넓게 펼쳐진 월대입니다. 월대에 선 채 몸을 조금씩 움직여 서울을 바라보면 도시는 사라지고 푸르른 풍경과 소리만 남게 되는데, 이 경험이 참 낯설기도 하고 쉽게 잊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어령 선생이 강조한 ‘공허’, 영원불멸의 ‘보이드’가 생각난다고 해야 할까요? 아버지와 이별한 이후에도 가끔 이 거대한 보이드를 찾았는데, 어쩌면 그 공허한 장소가 마음을 따뜻하게 채워주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슬픔과 근심을 머금은 얼굴을 한 동료에게는 이 말을 건네기도 했습니다. “종묘에 가보세요”

서울의 작은 산, 공허한 장소 보이드
스위스 출신의 건축학자인 제랄딘 보리오(Geraldine Borio)는 『서울의 작은 산』을 펴내며 다시 한번 보이드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앞서 『보이드를 찾아서: 아시아의 경계적 도시 공간에서 건축 실무의 지평을 넓히다』, 『홍콩의 사이 공간』 등을 통해서도 바로 이 보이드에 관해 조명했었죠.
설계하고 짓는 학문을 연구하는 이 학자는 ‘짓기’보다 ‘비우기’에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인 듯했습니다. 『서울의 작은 산』에는 비교적 익숙한 응봉산, 매봉산, 서리풀부터 봉제산, 궁동, 영축산 등 다소 생소한 ‘작은 산’이 참 많이 담겼습니다. ‘도심 속 작은 산’이라는 특별한 보이드에는 숲속도서관, 배드민턴장, 산속 헬스장(이른바 산스장), 족욕장, 황톳길처럼 공동체를 위한 요소로 가득합니다. 비웠더니 오히려 자유로운 상상과 사람들의 어울림으로 채워진 장소인 것이죠.

도심의 보이드를 채우는 것은 또 있습니다. 바로 야생조류와 몸집이 작은 야생동물, 식물입니다. 이들 모두가 ‘서울의 작은 산’이 없었다면 존재하기 힘들었을 터입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물부터 사계절 내내 도시를 아름답게 물들이는 숲은 한결같이 이 ‘작은 산’에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만들어진 호수
늦가을의 대만 기행을 계획했던 배경에는 남쪽 도시 타이난(台南)의 ‘더 스프링(The spring)’이 있었습니다. 세계적인 명성의 건축회사인 MVRDV가 설계한 이곳은 비장소(Non-place)를 허물어 장소로 거듭나게 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타이난 도심의 오래된 복합 상업시설을 허물어 기존의 골조를 남겼는데 마치 로만 포럼(Roman Forum, 고대 로마의 공공 집회 장소)처럼 근사합니다. 발목 높이에서 찰랑거리는 따뜻한 물은 동네 사람들 누구나 새로운 장소를 즐길 수 있도록 해줬습니다. MVRDV는 이곳을 석호(lagoon, 파도가 나른 퇴적물이 쌓여 형성된 호수)처럼 조성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자연 하천에 준하지는 않겠지만 도심의 열을 식히고 시민에게 휴식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참 소중한 장소가 탄생한 것입니다.

복합 상업시설의 지하 주차장에 만든 이 장소는 자연스레 성큰(Sunken, 움푹 내려앉은 공간)이 됐고, 적극적으로 비워내자 오히려 사람들로 채워졌습니다. 아마도 MVRDV의 이 프로젝트는 이용자들의 궤적과 경험을 장소에 가득 담기 위해 기획되었을 것입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가 이야기한 공간 생산의 세 가지 층위 개념 중 ‘재현의 공간(체험된 공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곳을 찾는 시민들이 저마다 행복한 추억을 만들어 의미를 부여하는 장소가 된 것이죠.
‘더 스프링’에서는 저도 아이들처럼 따뜻한 햇살과 윤슬, 플루메리아 꽃잎의 향기에 관한 추억을 쌓았는데요. 다시 갈 기회는 많지 않겠지만 먼 훗날까지 이 보이드의 기분 좋은 공허함을 떠올릴 것 같습니다.

메이플 리프 래그의 당김음, 공허의 시간
래그타임(Ragtime) 음악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작곡가이자 피아노 연주자 스캇 조플린 (Scott Joplin)은 영원히 잊지 못할 곡을 많이 남겼습니다. 특유의 그 당김음(싱코페이션)을 사용한 ‘더 엔터테이너’, ‘메이플 리프 래그’ 등의 악보를 읽다가 보면 촘촘한 음표가 가득합니다. 그런데 좀 더 찬찬히 악보를 들여다보면 의도적으로 빈틈을 만들어낸 것처럼 보이는 구간이 존재합니다. ‘공허의 공간’, ‘보이드가 있는 악보’라고 해야 할 듯합니다.
사카모토 류이치의 음악 가운데에도 특유의 공허함이 잘 묻어나는 곡이 있습니다. 바로 ‘아시앙스(Asience)’인데요. 단조롭지만 비장한 선율의 음표 사이마다 마치 도시와 건축의 보이드처럼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구간이 있습니다. 원래 ‘아시앙스’의 원곡은 광고를 위해 작곡되어 굉장히 빠르고 화려한 면이 있지만, 나중에 피아노로 편곡되면서 고유의 분위기를 갖게 됐습니다. 원곡이 마천루의 도시 같다면, 피아노 연주로 편곡된 ‘아시앙스’는 마치 너른 월대를 지닌 종묘나 보이드처럼 시원하게 뚫려있습니다.
그러니 산수유 나무에 새 순이 돋아날 즈음에는 ‘아시앙스’와 ‘메이플 리프 래그’를 들고다시 공허한 보이드를 찾아 산책에 나서야겠습니다. 아무리 채워도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것이 우리의 욕심이니 차라리 비워내 가득차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김현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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