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2년 미국에서 ‘밀레니엄 챌린지’란 군사 시뮬레이션 게임이 진행됐습니다. 국방부의 대규모 프로젝트였습니다. 블루팀과 레드팀으로 나뉘어 벌인 가상 전쟁이었습니다. 미군을 상징하는 블루팀은 수조원의 예산이 투입된 슈퍼컴퓨터 분석시스템과 최첨단 통신망으로 무장했습니다. 가상의 중동 독재국가인 레드팀에는 첨단 장비는 없었지만 베테랑 지휘관들이 있었습니다. 베트남전 등 수많은 전투 경험이 있는 밴 라이퍼 장군이 팀을 이끌었습니다. 누구나 블루팀의 승리를 점쳤습니다.
실전 경험이 많은 라이퍼 장군은 변칙을 동원했습니다. 통신망을 무력화하기 위해 무전기를 끄고, 이슬람 사원의 기도 종소리를 신호로 사용했습니다. 현장 지휘관들에게 “당신들의 직관을 믿고 즉각 판단하라”고 하고 전권을 줬습니다. 지휘관들은 정규전을 피하고, 비행기와 보트를 이용한 자폭 테러 등 변칙을 활용했습니다. 결과는 레드팀의 승리였습니다. “베테랑의 직관이 시스템과 데이터를 이겼다”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우리는 AI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무한한 데이터와 추론 능력으로 무장한 AI와 경쟁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주식시장에서 데이터를 분석하고, 미래를 점쳐야 하는 애널리스트들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AI 시대, 애널리스트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다 밀레니엄 챌린지를 떠올렸습니다. 인간의 경험과 직관은 여전히 AI에 추월당하지 않은 영역이 아닐까.
오래전 한 애널리스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업 탐방을 가면 그림이 놓여 있는 위치, 직원들의 표정, CEO의 인상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기 위해 애씁니다.” 회사의 미래와 관련된 힌트가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뭐 그런 것까지 관찰하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몇 년 전 한 기업인을 인터뷰하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 회사는 괜찮아 보였습니다. 국내 시장 지배력도 탄탄했고 미국 수출도 늘어날 것으로 전망됐습니다. 그러나 인터뷰 내내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습니다. 직원들을 대하는 태도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인터뷰 기사는 짧게 썼습니다. 그리고 그 회사에 대해 묻는 사람들에게 “주식은 절대 사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후로 1년여간 그 회사 주식은 거의 오르지 않았습니다. 오래전 애널리스트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어느 것 하나 놓치려 하지 않는다.”
애널리스트의 왠지 모를 느낌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현대 뇌과학은 이 직관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어떤 사건을 보면 신체가 먼저 반응하고, 뇌 속 피질이 각성하며, 축적돼 있는 기억(정보)을 불러와 순간적으로 판단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말콤 글래드웰이 ‘블링크’에서 강조한 전문가적 직관입니다.
또 다른 차원의 직관은 전략적 직관이라고 부릅니다. 지금까지 자본시장을 이끌어온 애널리스트들은 이 전략적 직관을 활용해 투자자들에게 길을 밝혀줬습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합니다. “AI는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을 하지 못한다.” 세상이 천동설의 지배를 받을 때 지동설을 주장하고 증명한 파괴적 발상은 인간의 영역이라는 말입니다.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은 전략적 직관의 전형입니다. 그는 그리스 천문학자 아리스타르코스가 주장한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아이디어를 차용했습니다. 그리고 프톨레마이오스 이래 천문학자들이 수집한 천체 관찰 데이터를 활용했고, 이를 눈부시게 발달한 삼각함수로 검증했습니다. 세 가지 조합이 역사적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온 것입니다.
국내 애널리스트들은 패러다임의 전환기마다 빛나는 직관을 보여줬습니다. 작년 조선·방산·원전을 시작으로 바이오, 로봇, 자율주행, 반도체로 이어지는 시장의 변화를 잡아내고 투자자들을 안내했습니다. 그 결과가 한경 베스트 애널리스트 선정이 아닐까 합니다.
순간적으로 왠지 이상하다고 느끼는 전문가적 직관, 축적된 역사적 사례에 대한 지식을 통찰력으로 조합해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전략적 직관. 이 두 가지는 애널리스트들에게 영원히 필요한 인간적 요소가 아닐까 합니다.
한 가지 더 있다면 과감한 실행입니다. 2007년 10월 미국 증권사 오펜하이머의 애널리스트 메러디스 휘트니는 씨티은행과 금융시스템 전반의 위기를 전망한 보고서를 내놨습니다. 남들은 다 괜찮다고 할 때였습니다. 약 1년 후 리먼브러더스는 파산하고 금융위기가 터졌습니다. 전략적 직관을 완성하는 것은 과감한 실행이라는 것을 입증한 사례입니다.
김용준 기자 juny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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