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로벌 안보 환경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한국 방위산업이 ‘글로벌 미들파워 허브’ 전략을 구현할 핵심 수단으로 주목받고 있다. 방산 수출은 단순히 무기를 판매하는 데 그치지 않고 수출·수입국 간 외교·안보·군사적 결속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방산 네트워크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면 한국은 국부 확대는 물론이고 독자적인 외교 활동 공간을 확보해 미들파워 중심 국가로 자리매김할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9일 방위산업진흥협회 등에 따르면 작년 한국 방산 수출은 240억달러(약 34조7000억원)로, 2022년 173억달러를 넘어 사상 최대치를 달성했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세계의 경찰’ 역할을 포기한 가운데 글로벌 분쟁이 늘어난 데 따른 것이다.
방산 수출은 단순히 무기 판매를 넘어 판매국과 수입국 간 정치·외교 관계를 업그레이드한다. K-9 자주포를 도입한 노르웨이와 폴란드 등 세계 10개국이 한국과 형성한 ‘K-9 클럽’이 대표적이다. 유지·보수·정비(MRO) 계약 등을 통해 통상 20~30년의 경제 협력, 공급망 연계, 인적 교류 확대, 공동 군사훈련을 통한 군사적·외교적 유대 등 부대 효과를 가져온다. 양욱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방위산업 수출을 적극 활용하면 급변하는 국제질서 속에서 한국이 외교적으로 존재감을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각국 재무장에 무기 발주 급증…방산 수출 21년 만에 170배 성장

국방부와 한화에어로스페이스(당시 삼성테크윈)가 K-9 자주포 첫 수출 계약을 체결한 건 2001년 7월이다. 튀르키예와 10년간 총 300대(1조3000억원 규모)의 K-9을 현지 생산하는 계약을 맺어 한국이 국산 무기체계 수출을 본격화할 수 있는 초석을 놨다. 이후 한국은 핀란드, 노르웨이, 인도, 에스토니아, 호주, 베트남, 루마니아 등 다른 9개국으로도 K-9을 수출하는 데 성공했다. K-9이 현재 한국 방산 제품 중 부동의 수출 1위 품목이 된 과정이다. K-2 전차, FA-50 전폭기, 천궁2 방공미사일, 천무 다연장로켓까지 가세하며 한국 방산 수출은 2001년 1억3500만달러에서 작년 240억달러로 170배 넘게 증가했다.
동일한 무기 체계를 쓰다 보면 두 나라의 외교적·군사적 관계도 업그레이드된다. 군대는 통신망을 공유하고 공동 훈련을 하면서 단순 우방국 이상의 관계가 된다. 이는 자연스럽게 군사동맹으로 발전하고 전쟁 등 유사시 같이 싸울 수 있는 ‘안보 연대’로 발전할 수 있다. 폴란드의 K-2 공장, 호주의 K-9 공장 등은 한반도 유사시 우리 군이 곧바로 사용할 수 있는 장비·탄약 등 공급처가 될 수 있다. 외교 관계가 방산 수출로 이어지고, 방산 제품이 다시 외교 연대를 강화하는 선순환 고리가 생기는 셈이다.
주변국에 진출하는 계기도 된다. 스웨덴이 앞서 K-9을 도입한 노르웨이와 핀란드의 영향으로 K-9 도입을 검토하는 게 대표적이다. 최근 정부와 기업이 페루와 이집트에 공을 들이는 것 역시 남미와 아프리카 시장 진출에 교두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석종건 전 방위사업청장은 “방산 제품 수출이 가격과 성능만으로 이뤄지지 않고 수출국의 외교·문화적 신뢰와 장기적 관계를 고려하는 것은 이런 점에 기인한다”고 설명했다. 한 국책연구원 연구위원은 “판매국과 수입국 간에 강력한 정치·경제적 결속 효과를 내는 방산 수출을 확대할수록 한국은 ‘민주주의 무기고’로 자리 잡는 동시에 진정한 ‘미들파워’ 핵심 국가로 올라서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각국은 국방비 지출을 급격히 늘리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북유럽과 동유럽은 핵심 시장으로 떠올랐다. 미국에 국방을 의존했던 유럽 각국이 재무장에 착수하고 있지만 서방 방산 강국들의 생산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중동과 아프리카 등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여파 등으로 무기 수입을 늘리고 있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에 따르면 2020년 1조9800억달러였던 세계 군사비 지출은 지난해 2조8000억달러를 훌쩍 넘긴 것으로 추정된다. 올해는 3조달러에 달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현재 입찰이 진행 중인 캐나다의 3000t급 잠수함 사업 역시 독일에 밀려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국가안보실 방위산업담당관을 지낸 최용선 법무법인 율촌 수석전문위원은 “캐나다는 방산 제품 수입에 따른 대응 구매나 경제적 협력을 요구하는데 한국엔 법적 근거가 없다”며 “이는 독일과의 입찰 경쟁에서 단점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한 방산업계 고위 관계자는 “여태껏 한국 기업과 정부는 재정이 약한 국가가 대물변제 등 한국에 법적 근거가 없는 요구를 하는 경우 아예 수출을 포기한 일도 적지 않았다”며 “정부가 대기업 특혜 논란 등에 휘말릴 것을 두려워해 제도 도입을 망설인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한국과 달리 미국은 상대국에 금융 지원은 물론 무상 원조까지 허용하는 대외군사판매제도(FMS)를, 프랑스는 다양한 방식의 절충교역을 허용하는 ‘정부 대 정부(G2G) 계약법’ 같은 수출 지원 제도를 갖추고 있다.
정부의 외교적 역량도 높여야 한다는 지적이다. 부품·기술을 공급하는 미국, 프랑스, 영국, 독일 등은 한국이 방산 무기 등을 수출할 때 제동을 걸 수 있어서다. 과거 한국이 K-9에 독일제 엔진을 쓰던 시절 독일 정부가 인권 침해 우려 등을 내세우며 반대해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로의 K-9 수출이 무산되기도 했다. 한 전직 외교관은 “한국산 방산 제품 수출이 늘어날수록 수입 국가와 적대 관계에 있는 나라들과 외교적 갈등이 불거질 수 있다”며 “이들과의 외교 관계를 사전에 관리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현일/배성수 기자 hiunea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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