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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고위험 금융상품 늪, '넛지'가 해법

입력 2026-01-11 17:39   수정 2026-01-12 00:08

금융감독원이 최근 홍콩 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불완전판매와 관련해 은행권에 조 단위의 천문학적 과징금을 예고했다. 사실 이 비극은 처음이 아니다. 지독한 기시감(Deja Vu)이다. 2011년 불거진 파생결합증권(DLS) 논란부터 2019년 대규모 원금 손실을 빚은 파생결합펀드(DLF) 사태까지, 고위험 상품의 불완전판매 이슈는 이름만 바꾼 채 도돌이표처럼 반복돼 왔다. 그때마다 금융당국은 강력한 제재를 가했고 은행은 쇄신을 약속했지만, 수익 추구라는 본능 앞에서는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했다.

지난해 11월 13일 열린 금융소비자보호 토론회에서 논의된 내용도 이 지점을 꼬집었다. 금감원장이 지적했듯, 이번 ELS 사태의 본질 역시 금융권의 단기 성과를 위한 ‘밀어내기식 영업’에 있다. 수익성에 눈먼 금융사들이 위험 관리는 뒷전으로 미루고, 고위험 상품을 마치 안전한 예금인 양 소비자에게 밀어낸 것이다. 반복되는 금융사고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과거와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토론회에서 제시된 해법은 주목할 만하다. 바로 규제의 칼날(과징금)과 함께 행동경제학의 부드러운 개입, 즉 ‘넛지(Nudge)’를 병행하자는 것이다. 넛지는 ‘팔꿈치로 슬쩍 찌르다’는 뜻처럼 강요나 금지 대신 선택의 설계를 부드럽게 바꿔 사람들이 스스로 더 나은 결정을 내리도록 유도하는 기법이다. 서울대 연구진이 발표한 활용 방안은 이런 넛지를 통해 금융소비자가 마주하는 ‘선택의 환경’을 재설계함으로써 불완전판매를 예방할 수 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기존 금융상품 설명서는 깨알 같은 글씨로 수익과 위험을 나열하는 데 그쳤다. 하지만 서울대 연구진의 제안은 달랐다. 설명서에서 수익보다 손실 정보를 시각화해 가장 먼저 보여주고, 원금 보장형 상품과 고위험 상품(원금 100% 손실 가능)을 나란히 비교해 제시했다. 결과는 극적이었다. 단지 정보를 보여주는 순서와 방식만 바꿨음에도 투자자들은 고위험 상품 쏠림에서 벗어나 포트폴리오를 분산하는 합리적 선택을 했다. 특히 판단력이 흐려지기 쉬운 65세 이상 고령층 투자자 사이에서 더 안전한 상품을 선택하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금융소비자보호법 시행 이후 현장은 녹취와 서류 더미에 파묻혔으나, 소비자가 소화하지 못하는 정보 폭탄은 보호가 아니라 고문에 불과하다. 이제 우리도 면피성 절차를 넘어 실질적 결과를 고민하는 선진국의 흐름에 동참해야 한다. 영국 금융행위감독청(FCA)은 소비자 의무를 도입해 금융사가 약관 전달을 넘어 소비자의 실질적 이해와 좋은 결과를 책임지도록 했으며, 유럽연합(EU)은 핵심정보문서(KID)를 통해 깨알 같은 설명 대신 신호등 모양의 그래픽으로 위험 등급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소비자의 인지적 한계를 인정하고 시스템으로 보완하려는 시도로, 정보의 양이 아니라 전달 방식 혁신이 진정한 소비자 보호임을 시사한다.

2조원에 달하는 과징금은 뼈아픈 경고다. 하지만 공포는 잊히기 마련이고, 과거 실수를 답습할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진정한 변화는 판매 프로세스를 인간 심리에 맞춰 재설계하는 데서 온다. 영국과 유럽처럼 소비자의 실질적 이해를 최우선 가치로 두고 시스템을 뜯어고쳐야 한다. “수익보다 위험을 먼저, 그리고 직관적으로 보여줘라.” 이 단순하지만 강력한 넛지가 창구에 자리 잡을 때 비로소 질긴 밀어내기 영업의 고리를 끊고 소비자 중심의 금융 생태계가 조성될 것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을 또다시 반복하지 않으려면 지금 당장 외양간의 설계도부터 바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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