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키폴 공항에서 기차를 타고 동남쪽으로 1시간30분을 달리면 네덜란드의 고급 연구개발(R&D) 인재들이 모인 ASML의 거점 도시 에인트호번이 나온다. 한국인들에겐 박지성 선수의 첫 유럽 구단 연고지로 익숙하지만 현지인들에게 이곳은 반도체 산업 최정점에 위치한 ASML의 공급망 생태계로 더 유명하다. 독보적인 기술을 보유한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기업과 국책 및 민간 연구기관이 밀집한 '더치테크'의 최전선인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기업은 VDL-ETG다. ASML이 900여 곳에 달하는 협력사 중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VDL-ETG 본사를 지난 11월 중순 한국 언론 최초로 방문했다.


이 거대 장비에서 웨이퍼는 머리카락 두께의 1만 분의 1보다 작은 오차 범위에서 움직여야 한다. 구조물이 미세하게 흔들리거나 열로 뒤틀리면 1장당 5000만원을 훌쩍 넘는 웨이퍼는 즉시 불량 판정을 받는다. ASML이 EUV 장비를 통해 웨이퍼에 미세 회로를 새기는 빛을 다루는 '두뇌' 역할을 한다면 VDL-ETG는 그 두뇌를 떠받치는 '근육'과 '골격'을 제작한다. 아무리 뇌가 뛰어나도 근육이 떨리고 뼈가 흔들리면 움직일 수 없듯 ASML의 첨단 기술도 VDL-ETG의 초정밀 하드웨어가 받쳐주지 않으면 구현될 수 없다고 물리학자들은 입을 모은다. 프림 부사장은 "EUV 장비 내부에서 웨이퍼가 이동하는 거대한 플랫폼과 수십톤짜리 진공 챔버를 비롯해 나노 단위 흔들림조차 용납되지 않는 초정밀 프레임 구조물이 모두 우리 손을 거친다"고 말했다.
VDL-ETG가 취재진에게 공개한 EUV 장비의 핵심 기술은 '자기부상(Magnetic Levitation) 기반 극초정밀 웨이퍼 이송 시스템'이다. EUV 공정에서는 회로를 새기는 광원의 성능과 함께 웨이퍼를 얼마나 흔들림 없이, 얼마나 깨끗하게 이동시키느냐가 수율을 좌우한다. 반도체 제작 공정에서 '재앙' 비유되는 먼지를 VDL-ETG의 이 시스템은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기존 웨이퍼 이송 장치는 바퀴·레일 기반 기계식 구조여서 아무리 미세하게 설계해도 마찰과 진동, 먼지, 마모를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다. 20~14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 공정에서는 이러한 먼지나 진동이 수율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하지만 3나노 이하의 초미세 공정에선 미세한 흔들림과 극미량의 먼지 하나가 수율 붕괴로 이어진다.
VDL-ETG의 자기부상 웨이퍼 이송 시스템은 먼지 발생과 진동 문제를 근본적으로 제거했다. 웨이퍼를 실은 플레이트가 바닥과 접촉하지 않고 자석 반발력으로 공중에서 이동해 마찰이 '0'에 수렴해 수율이 수직 상승한다. VDL-ETG의 자기부상 웨이퍼 이송 시스템은 자기부상 기차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바퀴가 없으니 마찰이 없고, 마찰이 없으니 진동이 없다. 프림 부사장은 "자기부상 플랫폼 위에서 웨이퍼를 나노 단위로 정밀 제어하는 기술은 물리학, 기계공학, 전자학, 제어공학이 동시에 결합된 '기초과학 종합세트'"라고 설명했다.
VDL-ETG가 단순 납품사가 아니라 ASML의 전략 파트너로 평가받는 이유는 초정밀 구조 설계부터 시뮬레이션, 시제품, 양산, 시험, 수리, 관리 등 제조까지 전 공정에 물리학 기반의 엔지니어들을 배치해 설계와 양산 과정의 간극을 줄인 데 있다. 프림 부사장은 "초미세화가 한계에 직면하면서 반도체 산업의 무게 중심은 '설계 경쟁'에서 '물리 한계 극복 경쟁'으로 이동했다"며 "네덜란드 테크 기업들 사이에서 물리학자를 얼마나 보유했는지가 기업 경쟁력의 척도로 떠올랐다"고 전했다.

물리학자처럼 문제를 접근하고 해결하는 방식은 청소년기에 형성되는 사고방식에서 비롯된다는 게 현지의 인식이다. VDL-ETG 뿐만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 반도체 산업 패권 유지를 위해 물리학 인재 양성에 국력을 쏟고 있다. 네덜란드 정부는 지난해 1월 반도체 산업계와 관계부처 장관이 참여하는 민관 협의 플랫폼 '세미컨보드NL'를 출범시키면서 물리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민간에서도 물리학 생태계 확장이 진행 중이다. 에인트호번공대는 ASML, NXP, TSMC의 후원을 받아 2023년부터 '에인트호번 반도체 여름학교'를 통해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물리학 과정을 개설했다.

네덜란드 물리학자인 헨드릭 카시미르의 이름을 딴 '에인트호번 헨드릭 카시미르 연구소(EHCI)'도 반도체 생태계에 물리학자를 공급하고 있다. EHCI는 에인트호번공대에 위치한 연구소로, 미래 반도체로 불리는 포토닉스와 양자 기술 분야의 연구를 수행 중이다. 에인트호번 인근 지역인 나이메이헨에 위치한 CITC도 물리학을 바탕으로 포토닉스 패키징 기술 개발에 매진하고 있다. 필립스에서 만들어진 '내츄르쿤디그'(NatLab) 물리 연구소가 이 연구소들의 운영에 참고가 됐다.
유럽의 4대 연구기관인 네덜란드국립응용과학연구기구(TNO)의 한국 대표인 박병훈 대표는 "회로가 미세해질수록 빛이 휘거나 전자가 예상과 다르게 퍼지고, 열이 한쪽에 몰리거나 재료가 뒤틀리는 변화가 발생해 결함으로 이어진다"며 "물리학은 이런 현상들을 광학, 열, 전자, 플라즈마 관점에서 미리 계산한다"고 강조했다. 빛을 정밀하게 다루는 리소그래피, 균일하게 깎고 쌓을 수 있는 식각·증착 장비를 설계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설명이다. 그는 "물리학이 반도체 공정 전반을 보이지 않는 수준까지 정밀하게 제어할 수 있게 해 주는 도구로서, 수율에 핵심 역할을 한다"며 "전자를 넘어 광자(포토닉스)와 양자(퀀텀) 시대가 올텐데, 그 중심에도 물리학이 있다"고 말했다.


에인트호번=강경주 기자 qurasoh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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