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치매 이후의 삶’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가 중요한 사회적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평균 수명이 길어질수록 판단 능력이 저하된 상태로 살아가는 기간도 함께 늘어나고 있으며, 이 시기를 어떻게 대비하느냐에 따라 개인의 삶의 질은 물론 가족의 부담 역시 크게 달라진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치매를 대비하는 법적·제도적 수단에 대한 관심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치매와 관련한 제도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성년후견이다. 성년후견은 판단 능력이 저하된 이후 법원의 결정을 통해 후견인을 선임하고, 그 후견인이 본인을 대신해 법률행위, 재산 관리, 일상생활에 관한 의사 결정을 돕는 제도다. 특히 의료·요양 선택, 거주지 결정 등 신상에 관한 보호 기능이 핵심 역할을 한다. 이 점에서 후견은 본인의 의사 표현이 어려워진 이후의 삶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라고 볼 수 있다.
다만 후견은 그 성격상 사후적 제도에 가깝다. 판단 능력이 현저히 저하된 이후에야 개시되며, 그 이전 단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재산 관리의 공백이나 혼란까지 모두 다루기는 어렵다. 또 획일적인 절차 속에서 개인의 생활 방식이나 의사를 충분히 반영하는 데도 한계가 있을 수 있다. 이 때문에 후견 제도만으로 고령사회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상황을 모두 포괄하기에는 현실적인 제약이 존재한다.
이런 한계를 보완하는 수단으로 주목받는 것이 신탁이다. 신탁은 판단 능력이 충분할 때 미리 계약을 체결해 두고, 이후 치매 등으로 의사 결정이 어려워질 경우에도 재산이 정해진 기준에 따라 관리·사용되도록 하는 제도다. 생활비, 의료비, 요양비 지급 방식 등을 사전에 정해 둘 수 있어 재산 관리 측면에서 예측 가능성과 안정성을 높여 준다. 신탁은 신상 보호보다 재산의 관리와 보호에 초점을 둔 제도라고 할 수 있다.
후견과 신탁은 기능적으로 구분되면서도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 후견이 주로 사람의 ‘신상’을 중심으로 보호하는 제도라면, 신탁은 재산이 목적에 맞게 사용되도록 관리하는 장치다. 판단 능력이 약화된 이후에도 의료비나 생활비가 안정적으로 지급되고 자금 사용 내역이 관리된다면 후견인 역할 역시 보다 원활해질 수 있다. 반대로 신탁이 마련돼 있지 않은 경우에는 후견인이 재산 관리까지 떠맡아 분쟁이나 혼란이 발생할 가능성이 커진다.
최근에는 신탁이 일부 고액 자산가만을 위한 제도라는 인식에서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가입 금액 기준을 낮추거나 구조를 단순화한 상품이 등장하면서 비교적 일반적인 생활 수준에서도 활용할 수 있는 형태로 점차 확장되고 있다. 생활비 지급 중심의 설계, 정기적인 관리 방식 등은 치매 대비라는 목적에 부합하는 제도라 할 수 있다. 이런 변화는 신탁이 일상적인 노후 준비 수단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또한 신탁은 재산 사용 기준을 미리 정해 두기 때문에 이후 가족 간 갈등을 줄이는 데도 도움이 된다. 누가 어떤 범위에서 자금을 사용할 수 있는지가 계약에 의해 명확해지므로, 의사 결정 과정에서의 오해와 다툼을 예방할 수 있다. 재산 사용이 기록으로 남는다는 점도 투명성을 높이는 요소다.
치매는 특정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는 위험으로 인식돼야 한다. 이에 대한 대비 역시 하나의 제도에만 의존하기보다,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진 장치들이 조화를 이루는 방식이 바람직하다.곽종규 국민은행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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