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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수의 재계 인사이드] 진짜 대기업의 조건

입력 2026-01-13 16:49   수정 2026-01-14 00:29

공정거래위원회는 매년 5월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이란 이름이 붙은 그룹 명단을 발표한다. 정부가 공식 인증한 대기업 리스트다. 명예와 규제가 동시에 뒤따르는 이 명단에는 지난해 기준 ‘총자산이 국내총생산(GDP)의 0.5%(11조6000억원) 이상’인 그룹 46개가 들어 있다. 삼성, SK, 현대자동차, LG, 롯데, 한화 등 한국을 선진국 반열로 이끈 전통 그룹 사이에 카카오, 셀트리온, 네이버, 쿠팡, 미래에셋, 하림, 호반건설, 넷마블 등 ‘창업 1세대’가 경영하는 기업도 여럿 이름을 올렸다.
2·3세 총수와 다르다는 창업가들
맨땅에서 기업을 일구는 과정에서 온갖 궂은일을 한 경험을 공유해서일까. 창업 1세대 기업인들은 강한 결속력으로 똘똘 뭉친다. 수시로 만나 시시각각 변하는 경영 환경에 대해 토론하고, 징벌적 상속세나 과도한 노동 규제 등에 대해 함께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일부 창업 총수는 정서적 유대감이 없는 기업이나 집단엔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고 경제계 관계자들은 말한다. 1~2년 전 한 경제단체 고위 임원이 신흥 대기업 총수에게 가입을 권유하자 “우리는 기존 회원사들과 결이 달라서 곤란하다”며 고사했다고 한다.

가입을 권유한 이 임원은 “창업가는 회원사의 주류인 재벌 2·3세와는 출발부터 다르다는 걸 에둘러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상당수 창업가는 2·3세 경영인들을 ‘곱게 자란 도련님’으로 여긴다고 한다. 일부 창업가가 “한국에서 창업가(founder)와 기업가(enterprenuer), 경영인(management)이 같은 뜻으로 통용되는 건 잘못”이라고 지적하는 것도 이런 인식에서 출발한다. 위험을 감수하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 ‘창업가’는 혁신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사업을 키우는 ‘기업가’가 될 수 있지만, 회사를 물려받은 재벌 2·3세는 아무리 회사를 키워봤자 그저 수완이 좋은 ‘경영인’에 그친다는 것이다.

틀린 얘기는 아니다. 척박한 국내 경영 환경을 딛고 맨손으로 큰 기업을 일궈냈으니, 잘 구축된 시스템을 갖고 출발한 2·3세 경영인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세금 내고, 일자리 만들고, 한국의 위상을 높인 창업가들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요즘 곳곳에서 ‘기업가정신 회복’을 부르짖는 것도 한국 근대화를 이끈 이병철, 정주영, 최종건, 구인회 같은 걸출한 ‘창업 영웅’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한 답답함의 발로다.
국민 정서 외면하는 쿠팡 총수
문제는 ‘나는 다르다’는 창업가의 자신감이 ‘내가 하는 건 문제없다’는 인식으로 바뀔 때다. 최근 쿠팡을 보며 든 생각이다. 쿠팡은 개인정보 유출 사태로 전 국민이 분노하는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3자 유출 정황은 없다. 소비자 피해는 미미하다”는 주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창업자 범 킴(김범석)이 미국 국적을 활용해 미국 정관계에 로비하고, 한국 정부를 압박한다는 의혹에 ‘뻔뻔하다’는 반응이 대다수다.

LS, 한진그룹과 갈등을 빚고 있는 호반에 대해서도 비슷한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지난해 초 자회사 대한전선과 소송 중이던 LS전선의 모회사 LS 주식 약 4%를 샀다. ‘소송 상대방을 압박하려는 의도’라는 비난이 커지자 호반은 “전선 산업의 미래 성장성을 보고 투자했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11월 호반은 별다른 해명 없이 LS 지분을 전량 매각하고 1000억원대 평가이익을 챙겼다.
기업도 '격(格)'을 갖춰야
<격(格)의 시대>의 저자 김진영 연세대 교수는 과거 한 인터뷰에서 기업의 격에 대해 ‘기술을 넘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성을 담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재벌 2세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 회장이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를 복원하고,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이 상하이시 재개발 계획에 따라 청사가 사라지는 걸 막은 게 대기업의 격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격이 중요해지는 이 시대의 대기업은 그저 자산 규모로 따질 수 있는 게 아니다. 단순히 돈벌이만 생각하는 기업이 아니라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업만이 한국 경제를 이끄는 대들보로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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