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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과 매일 '새로운 우주' 만난다"…천재 피아니스트들의 스승

입력 2026-01-15 16:48   수정 2026-01-16 02:41

미국 보스턴 뉴잉글랜드음악원 피아노학과장 백혜선(61). 그의 이름 앞에는 오랫동안 ‘한국 국적 최초의 차이콥스키콩쿠르 입상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만 29세에 서울대 음대 최연소 교수로 임용된 그는 세계 무대 연주자이자 후학 양성의 중심에 서 있다. 지금 그를 설명하는 가장 적확한 단어는 ‘스승’이자 ‘어른’이다. 서울에서의 대면 인터뷰, 보스턴을 연결한 화상 인터뷰를 통해 피아니스트 백혜선과 두 차례 만났다.

보스턴 NEC 318호, 미래 음악가의 둥지
지금 세계 클래식 음악계의 시계는 보스턴을 중심으로 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중심에 뉴잉글랜드음악원(NEC)이 있다. 백혜선은 이곳 피아노학과장이다. 최근 몇 년 사이 NEC는 세계 최고 피아니스트의 산실로 입지를 굳혔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가르치던 손민수 교수가 이곳에 합류했고 스승을 따라 임윤찬이 날아들었다. 백혜선의 제자인 김세현은 지난해 롱티보콩쿠르 1위라는 낭보를 전했고, 제19회 쇼팽콩쿠르 우승자 에릭 루 역시 NEC 예비학교가 배출한 스타다. 신창용 홍석영 김송현 등도 이곳에 적을 두고 있다.

NEC 캠퍼스 조던홀 빌딩 3층, 복도 끝 318호. 백혜선의 연구실이다. 반대편 끝에는 피아노학과 ‘대모’ 변화경 선생의 방이, 그 옆에는 손민수 선생의 방이 자리한다. 전설의 피아니스트 마르크-앙드레 아믈랭, 콩쿠르 ‘일타 강사’ 당타이선 등 거장의 연구실이 모여 있다. 정작 백혜선의 방은 소박하다 못해 텅 비어 있다. 벽에는 흔한 그림 한 점, 화려한 장식품 하나 없다. 피아노 두 대와 편안한 의자가 전부다.

“제 방은 그냥 연습실이에요. 누구든 와서 쓸 수 있는 열린 공간이죠. 제 삶이 좀 방랑자 같거든요. 20대 때는 집처럼 꾸미기도 했지만, 지금은 이 공간도 언젠가 떠날 수 있는, 제자들을 위해 잠시 머무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공간을 ‘제자들의 연습실’로 내어주는 마음. 털털하고 소박한 강의실은 백혜선의 리더십과 닮았다.
‘네가 최고야’ 제자들 키운 응원의 힘

백혜선 주변에는 늘 사람이 모인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사업가 기질’을 타고났지만, 그 연결고리는 이익이 아니라 선의다. 그는 “자식을 키우는 사람은 무조건 다 퍼줘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다. “내가 남의 자식을 정성껏 키우면 결국 남들이 내 자식을 키워준다는 생각으로 살아요.”

이런 철학은 교육 현장에서 빛을 발한다. NEC 피아노학과 교수진은 12명. 입학 경쟁률은 치열하다. 600명이 지원하면 합격자는 30명 남짓. 이 중 백혜선은 올해 유독 많은 24명의 제자를 가르쳤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처럼 위에서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 학과 전체 분위기가 결정됩니다.”

그의 리더십은 상처 주고 혹독하게 몰아붙이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 대신 용기를 불어넣고 관심을 기울이는 것으로 섬세한 음악가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음악가들은 순수하고 어떤 면에서는 아이 같아요. 나를 위해 살고 싶은 욕구가 강하고, 누군가 관심을 가져주면 무한히 성장하죠. ‘네가 최고야’라는 응원이 공기를 바꿉니다.”

물론 그 위에는 스승 변화경 선생이 있다. 백혜선은 “한국에 김대진 선생이 있다면 보스턴엔 변 선생님이 계신다”며 “건강한 비평과 날카로운 조언으로 음악가를 만드는 철학을 가지신 분”이라고 존경을 표했다. 백혜선은 그의 가르침을 시대에 맞게 변환했다. 치열한 경쟁보다는 문제를 공유하고 함께 해결하는 ‘열린 클래스’를 만들었다. 그리고 스승의 선한 영향력은 제자들에게 고스란히 흘러 내려간다.
유일한 안식처는 집, 영감은 책에서
겉보기에 화려한 학과장의 삶이지만 일상은 고행에 가깝다. 매일 오전 6~7시 일어나 무조건 피아노 앞에 앉는다. 오전에 행정 업무를 몰아 하고, 오후 1시께 학교에 도착하면 그때부터 ‘릴레이 레슨’이 시작된다.

백혜선의 레슨은 시간제한이 없기로 유명하다. 한 학생의 레슨이 길어지면 몇 시간이고 늦어지기 일쑤다. 밤 12시, 학교 문을 닫을 시간이 돼서야 비로소 일과가 끝난다. 끼니를 거르며 지도한 후 제자들에게 밥을 사 먹이는 것이 그의 낙이다.

에너지를 충전하는 안식처는 자택 연습실이다. 고교 때부터 40년 넘게 함께한 피아노와 벽면을 가득 채운 책들, 통창 너머로 반짝이는 호수가 사계절 내내 머무는 곳이다. 그는 이곳에서 피아노를 치고 책을 읽으며 살아갈 힘을 쌓는다. 스마트폰의 파편화한 정보가 아니라 깊은 사유가 필요한 책을 귀히 여긴다. “책은 저자와 대화를 나누는 과정이에요. 사유하게 하고 상상하게 하죠. 저에겐 가장 큰 휴식입니다.”

그는 음악을 ‘텍스트 해석’에 비유한다. 음악은 결국 음표라는 언어를 표현하는 작업. 연주자의 정신과 영혼이 담긴 ‘목소리’가 나와야 한다고 강조한다. “음악가는 대본(악보)을 완벽히 이해해 1인 다역을 소화하는 배우가 돼야 하죠. 정제된 의도가 들어갔을 때 비로소 소리는 음악이 됩니다.”
젊은 후배들을 향한 열린 찬사
지난해 11월 보스턴 심포니홀에서 열린 임윤찬의 골드베르크 연주회 이야기를 꺼내자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백혜선은 “우주를 목격했다”고 했다. “저 친구는 우주를 혼자 갖고 있구나. 무궁무진한 큰 세계를 살짝 맛보여준 거구나. 너무 놀라서 어안이 벙벙했어요. 저 젊은 친구가 ‘음악을 다시 썼구나’ 싶어 경이로웠습니다.”

그는 임윤찬의 비상 뒤에 스승 손민수의 헌신이 있었음을 강조했다. “임윤찬이 날아다니지만 그 날개를 달아준 건 손민수 선생이에요. ‘선생님처럼 되고 싶다’던 꼬마의 꿈이 이뤄진 거죠. 공연 후 손 선생에게 말해줬습니다. ‘너는 살면서 할 도리를 다했다. 한국을 넘어 세계를 대표해 큰일을 해냈다. 정말 축하한다’고요.”

백혜선은 후배들의 성취를 경계하는 대신 그들의 ‘새로운 우주’를 존중하는 너른 품을 지녔다. “듣는 사람의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해요. ‘어디 한번 쳐봐라’ 하는 태도가 아니라 한번 들어보자는 마음이면 그 사람의 음악 세계가 보입니다.” 그는 지금도 제자들에게 강조한다. “생각은 그만, 가슴으로 느껴라. 아름다움이 확 와닿아야 한다.”

좋은 사람, 위대한 아티스트 그리고 모범이 되는 교육자. 백혜선은 보스턴이라는 낯선 곳에서 세 가지를 모두 이뤘다. 그리고 그의 선의는 많은 후배에게 닿아 그들의 미래를 밝히고 있다. 미래의 피아니스트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좋은 음악은 음표를 완벽하게 치는 데 있지 않고 사람들에게 어떤 자극과 느낌을 주는 것입니다. 결국 음악은 여러분의 영혼이 반영된 목소리여야 합니다.”

조민선 기자 sw75j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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